-외로울 땐 독서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1)
이 책에는 모두 11개의 에세이가 있다. 한 편 한 편이 모두 눈부시도록 빛이 난다. 그 글들의 광채에 눈이 부시다. 모든 글들이 음미해야 할 깊이 있는 내용이어서 건성으로 읽다 보면 놓쳐버리게 된다. 또 글들이 웅숭깊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천천히 씹어야 한다.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쓴 글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의 역량에 따라 다양하게 열릴 것이다. 이 멋진 텍스트를 좁쌀만 한 내 능력만큼 밖에 읽어내지 못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단 한 편씩 읽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작품; <자화상>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 줄을 쓴 다음엔 단어들이 다시 자신들이 속한 언어 생명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내버려 둔다. 그러면 거기에서 한 무리의 다른 단어들이 그 말들을 알아보고 맞아 준다. 그들 사이에 의미의 유사함, 반대 의미, 비유, 운율이나 리듬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나는 그들이 나누는 담소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함께 단어들은 내가 자신들에게 부여하기로 한 의미를 놓고 경쟁한다. 그들은 내가 부여한 역할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면 나는 문장을 다듬고, 단어를 한두 개 바꾸어서 다시 밀어 넣는다. 다시 담소가 시작된다.
잠정적인 동의를 나타내는 낮은 웅성거림이 들릴 때까지 그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다시 담소가 시작된다···.(10~11쪽)
윗글을 보면, 존 버거가 글을 쓸 때 쓰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이 거의 완전한 혼연일체에 이른 상태에서 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글쓰기 과정을 어떻게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간결하면서도 독자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글을 썼다. 읽기 쉬운 글이 쓰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글이다. 대가의 글을 아주 모범적으로 잘 보여주는 글이다.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하다.
화가인 그는 그림을 그릴 때도 글 쓸 때의 태도를 그대로 견지한 것 같다.
드로잉을 할 때, 나는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서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 외양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나의 모국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9쪽)
그의 그림, <올리브의 텍스트>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작품; <로자를 위한 선물>
폴란드 출신의 독일 혁명가이자 정치이론가인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1871~1919)에 관한 글이다. 로자는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하고 혁명 활동을 벌이다 살해당했다고 한다.
존 버거는 죽은 폴란드 친구인 자닌의 아들에게서 받은 성냥갑 세트 상자를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보내고 싶어 한다. 크기가 A4만 한 그 성냥갑 상자 속에는 모두 16개의 성냥갑이 들어있다. 각각의 성냥갑에는 열여덟 종의 명금鳴禽들의 모습 이 상표처럼 그려져 있다. 새들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적혀 있다.
존 버거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상당히 아끼고 존경하는 것 같다. 그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종종 내가 읽고 있는 글에 등장하고, 또 가끔은 내가 써 보려고 애쓰는 글에도 등장합니다. 그렇게 당신은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미소를 지으며 나의 작업에 동참하지요. 그 어떤 책도, 혹은 반복적으로 당신을 가두었던 감방들도 당신을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13쪽)
그는, 로자가 감옥에 있을 때 그녀의 친구가 애도의 편지를 보내자 그녀가 답장한 글을 인용했다.
“인간답게 지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건 확고하고 분명하며, 활기찬 것을 의미하죠. 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 앞에서도 활기차게 지내는 것이여. 흐느끼는 건 약한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입니다.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매일매일의 화창함과 모든 구름 조각들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겠지요.”(15쪽)
로자의 글에서 그녀의 인생관을 잘 알 수 있다. 어떤 일 앞에서도 활기차게 지낼 수 있고,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진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화창함과 모든 구름 조각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는 일!
이렇게 살아야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이다. 백 년 전에 살았던 한 인물의 삶이 여전히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듯하다. 단단하고 긍정적인 그녀의 모습에서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듯하다.
그녀는 1918년, 러시아 혁명에 대해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다.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다수라고 하더라도-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 정의라는 관념에 대한 열광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가 지니는 유익함이나 총체성, 그리고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은 모두 이 본질적인 특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특권이 될 때 그 효용성도 사라질 것입니다.”(16쪽)
오늘날의 ‘자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한 말이다. 이 시대는 혹시 ‘누구’만을 위한 자유가 흔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지금도 제대로 실현되지는 않은 것 같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틀리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다름’과 ‘틀림’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그 차이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는, 진정한 자유가 실현되는 시대는 언제쯤 올 것인가, 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역사는 왜 진보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대중들의 지도자는 대중들 자신이며, 그들은 변증법적으로 자신들의 발전 과정을 창조해 나간다."라고 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대중들의 지도자가 과연 대중들 자신인가? 이 물음에는 아직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존 버거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 지었다.
이 성냥갑 상자를 어떻게 당신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당신을 죽인 깡패들은 당신의 사체를 토막 낸 다음 베를린 운하에 버렸습니다. 석 달 후 썩는 물에서 사체가 발견되었죠. 그게 당신의 사체가 맞는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암울한 시대에 이 글을 씀으로써 나는 그 상자를 당신에게 보낼 수 있습니다.
“나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보여 준 본보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로자. 그리고 여기, 나는 당신이 보여 준 본보기를 향해 이 물건을 보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애도하며 보내는 존 버거의 성냥갑 세트 선물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긴 물결을 타고, 로자에게 분명히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존 버거의 글을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 관한 책을 좀 찾아보아야겠다. 책은 늘 또 다른 책을 찾게 한다. 그것은 책이 갖고 있는 적지 않은 즐거움이다.
*이 책은 얇지만 깊이가 있는 책이어서, 도저히 한꺼번에 내용을 다 실을 수 없어서 몇 차례로 나누어서 싣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