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세 번째 작품; <당돌함>
존 버거는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읽고 카뮈가 그를 어른으로, 작가로 만들어 준 무언가를 어린 시절을 비롯한 인생의 초반부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보고, 존 버거 자신을 지금의 이야기꾼으로 만들어 준 건 무엇일까 자문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종의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는 사랑을 베풀어 준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건 약간 이상한 종류의 고아였다. 안쓰럽다고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떤 물질적 환경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어떤 면에서는 부추기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시장에 내다 팔 케이크와 과자를 만드셔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정작 나를 돌봐 준 사람은 뉴질랜드 출신의 보모였다.(25~26쪽)
존 버거는 일찍부터 기숙학교에 다녔고, 가족들이 모이는 날은 크리스마스 때뿐이었다. 그는 크리스마스 만찬 후에는 친척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며 웃겨야 했다. 그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별난 메신저 같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생각처럼 아마 이때의 경험이 존 버거를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고아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와 함께 어떤 특별한 기술도 익히게 된다. 그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27쪽)
그는 네댓 살에 프리랜서가 된 후 줄곧 만나는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고아일 거라고 생각하고 대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고아들끼리의 공모共謀를 제안한다. 우리는 서로 윙크를 나누고, 위계를 거부한다. 모든 위계를.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계를 무시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당돌하다. 우주의 별들 중 절반 이상이 그 어떤 성운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별이다. 모든 성운을 다 합친 것보다 그 별들이 내는 빛이 더 많은 셈이다.
당연히 우리는 당돌하다. 그리고 내가 독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방식 역시 그럴 것이다. 마치 여러분들도 고아인 것처럼 말이다.(27쪽)
사실 모든 인간들은 정신적으로 고아인 상태, 즉 고독하다. 고독한 인간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 프리랜서이다. 그리고 우주의 그 어떤 성운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별 같은 존재인 것이다. 혼자 살아가려면 당돌해야 한다. 당돌하다는 말은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당돌함’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어떤 파격의 정서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뚜렷한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고 삶을 헤쳐 나간다는 함의도 있는 것 같다.
네 번째 작품; <넘어지는 기술에 관한 몇 가지 노트>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에 관한 이야기.
광대는 삶이란 잔인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고대 궁정 광대의 알록달록하고 밝은 복장은 이미 자신의 남달리 우울한 표정에 대한 농담이었다. 광대는 지게 마련이었다. 패배는 그가 하는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다.
채플린의 익살이 지닌 에너지는 반복적이고 점점 커진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인 어떤 사람.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복수성 複數性이다.
또한 그 복수성은 그의 희망이 반복적으로 산산조각 나는 일에 익숙해진 후에도 여전히 다음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반복해서 굴욕을 당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반격을 할 때도 그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그런 평정심이 그를 무적의 존재로, 거의 불멸의 존재로 보이게 한다. 희망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사건들 틈에서 그 불멸성을 감지한 우리는, 웃음으로 그 알아봄을 인정한다.
채플린의 세계에서 웃음은 불멸성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36~38쪽)
존 버거는 찰리 채플린의 웃음에서 불멸성을 보았다. 채플린은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매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불멸의 복수성複數性을 지녔다. 수없이 넘어지지만 잔인한 삶을 익살로 받아치고 다시 일어나는 광대는, 희망 없는 일상에서 웃음이라는 불멸의 빛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영원히 멸하지 않는 한 줄기 빛으로 남아 있다.
존 버거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팔십 대 중반의 채플린의 모습과 렘브란트의 자화상 <웃고 있는 철학자, 혹은 데모크리토스의 모습을 한 자화상> 속의 렘브란트가 몹시 닮아있는 것이었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나는 그저 보잘것없는 코미디언 일뿐입니다.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