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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3)/존 버거/열화당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다섯 번째 작품; <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50년 지기인 친구 스벤 블롬베리 Sven Blomberg를 회상하며 쓴 글. 존 버거는 스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톡홀름에 갔다. 장례식 전날 그는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에 가서 스벤과 함께 보았던 그림들, 특히 스벤이 좋아했던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의 풍경화를 보며, 스벤이 ‘살갗과 닿는 드레스 안쪽 같은 그림!’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며 상념에 젖었다.



스벤은 육십 년 넘게 전업 화가로 활동했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화가보다 작품이 팔리지 않았던 화가였다. 그 결과 그는 물질적인 곤경에 빠졌다 그는 늘 돈이 부족했다. 평생 동안, 가장 소박한 화가들이 적당한 작업실이라고 부를 만한 곳을 가지지 못한 채 지내야 했다. 그리고 소수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붓이나 파스텔, 펜을 들고 작업에 임했으며, 많은 날을 더 이상 빛이 들지 않을 때까지 꼬박 일했다. 그렇게 그는 자연이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내던 계절의 순수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43~44쪽)



스벤 블롬베리는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비록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해가 질 때까지 작품에 몰두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현실의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스벤 블롬베리를 묘사한 글을 읽으며, 예술과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은 꼭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인정을 받는 작품만이 진짜 예술품인가?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가난하게 산다. 예술은 상업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화가들 작품이 천문학적으로 비싸기도 하지만 말이다.


예술가들은 창작하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들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 고통에 무게를 두고, 예술가들은 기쁨에 더 무게를 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창작활동을 계속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어려움만을 본다면 예술가만큼 비참한 삶도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불행하지 않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다만 세속의 가치관과 그들의 가치관이 다를 뿐이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은 필요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각각의 삶은 각각의 다른 가치를 지니는 것이므로.


존 버거는 스벤과 친구로 지내며 함께 했던 많은 일들을 기억했다. 그와 함께 지붕을 수선하고, 요리하고, 책을 만들고, 여행하고, 시멘트를 섞고, 시위에 참여했던 일들을.


그리고 스벤의 마지막 나날들을.


파킨슨병이 진행되고 있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의 후견인은, 그의 기력이 충분한 날이면, 과일들이 놓인 접시였다. 그가 가족과 함께 지내던 스톡홀름 중심부의 공동주택 주방 식탁 모퉁이에, 긴 손가락을 떨며 배열했던 과일들. 그는 그 과일들을 놓고 오일 스틱으로 엽서만 한 정물화를 그렸다.(44쪽)



친구 스벤은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그의 내부의 어떤 강렬함이 죽음조차도 초월하게 했던 것 같다. 존 버거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친구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을 잘 알 것 같다. 그는 결코 슬프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가 늘 말했듯이 그는 슬픔의 텍스트를 충실하게 그려냈다. 그 점이 존 버거 글의 매력이다.


존 버거는 런던에서 열렸던 대규모 푸생 전시회에서 스벤을 처음 만났다. 그때 그들은 푸생의 <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를 함께 보았다. 존 버거는 그 당시 그림 앞에서 스벤이 했던 말을 기억하며 글을 맺었다.


훌륭하네요!... 그림 안의 모든 요소들이 비문을 읽고 있는 남자의 팔 그림자 쪽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안내하고 있어요! 보이시죠? 여기 이 그림자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내게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이 글에서 친구 스벤 블롬베리의 그림을 함께 수록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아르카디아 arcadia: 목가적 이상향

*스벤 블롬베리 Sven Blomberg: 스웨덴의 화가. 존 버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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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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