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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4)/존 버거/열화당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여섯 번째 작품: <깨어 있음에 관하여>


존 버거가 좋아하는 시립 수영장과 그 수영장의 유리로 된 외벽과 평평한 지붕을 통해서 본 사탕단풍나무와 새털구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수영장 이용객들에 대한 그의 상념이 흥미롭다.


수영장 이용객들은 평등한 익명성을 공유한다. 신발도, 계급을 알리는 표지도 없이, 그저 각자 입은 수영복뿐이다. 지나치다 다른 사람을 우연히 건드리면 사과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무한한 잔인함, 조직화되고, 무언가에 세뇌되었을 때 보일 수 있는 그런 잔인함을 이곳에서는, 스무 바퀴‘째를 향해 몸을 뒤집으면서는 상상하기 어렵다.(53~54쪽)


옷은 때로는 신분을 상징한다. 그러나 수영장에서 입은 수영복은 옷이라기보다 육체를 가리는 작은 천 조각에 불과하다. 인간들은 옷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로 있을 때는 원초적인 평등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런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 ‘무한한 잔인함’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아름답다. 우리에게 그런 시간은 언제 올까. 그런 시간이 언제 우리에게 있기나 했던가.


그는 수영장 유리벽을 통해 본, 키 큰 사탕단풍나무를 그렸다.


하늘을 찌를 듯 위로 뻗은 나뭇가지들 때문에 나무 전체의 형태는 나뭇잎 하나하나와 닮았다.(대부분의 나무들은 어느 정도는 이런 경향을 보인다.) 단풍잎이 깃 pinnate처럼 생겼다. ‘깃털’을 뜻하는 라틴어가 ‘피나 pinna’다. 잎의 앞면은 샐러드의 녹색이고, 뒤쪽은 녹색빛이 도는 은색이다. 단풍잎이 깃 모양이 되는 건 운명이다(...) 종 이 한 장에 나무 전체와 가까이에서 본 나뭇잎 한 장을 함께 스케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단풍나무의 유전자 코드에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거라고(...) 그건 일종의 사탕단풍나무의 텍스트가 되는 거라고.
그런 텍스트는 말 없는 어떤 언어에 속한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 말이다.(54쪽)



20190219_132957.jpg?type=w1 <사탕단풍나무의 텍스트>



그가 말하는 어떤 대상의 텍스트는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읽어온 언어이다. 그 언어는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원초적인 모국어나 원형原形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말 할 수 없는 텍스트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자주 본능적인 그리움의 형태로 현현顯現되기도 한다.


그는 이번에는 수영장 유리 지붕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엔 하얀 새털구름 cirrus clouds이 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털들이 움직이는 건 구름에 작용하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구름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어떤 운동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잠든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55쪽)


털들의 움직임을 오래 지켜볼수록 나는 말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종종 손가락들이 하는 말 없는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사실 여기서 이야기는 아주 작은 얼음 결정과 파란 침묵이 전하는 이야기다. (56쪽)


새털구름은 북쪽,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제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57쪽)


20190219_133055.jpg?type=w1 <새털의 텍스트>



풍경 묘사가 멋지다. 구름을 마치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고 있다. 구름을 오래오래 쳐다보고 있다 보면 내가 구름을 보는 게 아니라, 구름이 나를 내려다보는 경지에 이른다. 자연과 인간이 일치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해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오랫동안 내 가슴에 머무르다 새털구름처럼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어느새 나도 구름이 되어서 흘러가는 듯한 묘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존 버거의 글은 매력이 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시적이고, 또 그러면서도 깊은 철학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을 보면 자꾸만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일곱 번째 작품: <만남의 장소>


존 버거는 이라크 시인 압둘 카림 카시드 Abdulkareem Kasid 시를 읽는다.


나의 두 손으로

과거와 미래로부터

두 개의 돌멩이를 집어 들어

그것들을 쥐고 달리지.

가장 가벼운 산들바람에도 나는 날아올라,

더 큰 바람을 불러오지, 이리 오라고

그리고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린 후

그리고 나는 고아처럼

길가에 앉아, 애도하지

나의 두 돌멩이를



그는 시를 읽은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목소리,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그가 질문을 하는 방식은, 나로 하여금 사막에 있는 게 어떤 경험일지 생각하게 한다. 사막에는 모래와 하늘 사이의 공간이 무한해 보이는 곳들도 있고, 그 둘 사이에 공간이 전혀 없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들을 걸어서 지날 때면, 똑바로 선 몸으로 느끼는 공기의 질감은 두 곳 모두 같다. 카시드의 단어들이 읽는 이의 상상 속에서 가지는 질감이 그렇다.
시들 하나하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만, 각각의 시에서 독자들은 과거와 미래가 현존하고 있음을 감지한다.(60쪽)

‘압둘카림 카시드’라는 이라크 시인은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소개가 되지 않았나 보다. 그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아주 단순하게 쓰여 있다. 그러나 이라크의 배경을 자세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존 버거의 해석에 따라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광막한 사막에서의 땅과 하늘로 대비했다. 그런 시각이 놀랍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의 부단한 시공간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하는 시다.



다시, 시 속으로



멀리 있는 카페-

지금 나무처럼 보이네

가지와 잎으로 지붕을 삼고

의자들은 그 목재로 만들었지.

그곳을 찾는 이들은 거기 앉는 걸 좋아하지

가볍게, 그 가지 위에.



존 버거는 시를 이렇게 해석했다.


카시드와 그가 속해 있는 시적 전통은 과거를 향수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해서도 이상향을 보듯 바라보지 않는다. 카시드는 역사를-마치 만남의 장소라도 되는 것처럼-드나든다. 그건 어떤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할 이를 찾기 위해서다.(61~62쪽)



역사를 만남의 장소로 보고, 또 그 만남의 장소에서 함께할 이를 찾는 일. 시인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게는 그것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은 인류의 희망의 몸짓으로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시의 텍스트에는 수많은 출입구들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압둘카림 카시드’라는 시인에 대해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언젠가 그의 시를 다시 만날 때가 있으리라.



여덟 번째 작품: <라 라라라 라라라 라>


매년 10월 첫 번째 주, 이탈리아 어촌 코마키오 구월 광장에서는 장어 축제(Sagra dell’ Anguilla)가 열린다. 그곳 중세 시대의 종탑 옆에 민속 악단이 자리를 잡고 연주를 한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반원을 이루고, 가수의 손동작을 따라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추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존 버거는 코마키오의 구월 광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어떻게 개별적이고 다양한 수백 개의 마음에 똑같은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면서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 Cesaria Evora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 들어보는 가수여서 검색을 해보았다. 그녀는 서부 아프리카의 섬 카보 베르데 출신의 가수였다. 카보 베르데는 포르투갈어로 ‘녹색의 곶 green cape’라는 뜻이다. 이 섬은 1460년대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탄 배가 우연히 다다르기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 섬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노예를 데리고 간 대서양 노예무역 중간기지의 역할을 한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1999년 세자리아 에보라가 그녀의 앨범 <Café Alantico>에서 이 섬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렸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모르나 Morna’라고 하는데, 아프리카의 토속적 리듬과 카리브해의 쿠바, 브라질을 오갔던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멜로디가 얹힌 것이라고 한다. 가사는 조국의 가난, 이산과 망향의 슬픔을 노래한다.


https://youtu.be/zsH4qe_Dwjc?list=PLCDF8C409E383EF65


광장의 사람들은 이제 다음 곡을 기다린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동안, 존 버거는 라벤나 외곽의 클라세에 있는 성 아폴리나레 성당에 있는 육 세기에 지어진 제단 뒤쪽 반원형 지붕의 모자이크화에 대해 생각했다.



모자이크화는 지상과 천국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나무와 새와 풀과 돌과 양들도 있다. 꼭대기에 있는 하나님의 활짝 편 손은 조약돌 하나만 한 크기다. 한가운데에 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도 그렇게 펼친 하나님의 손보다 크지 않다(...) 작품의 주제는 명목적으로는 갈릴리의 타보르 산에서 보여 준 그리스도의 변신이지만, 모자이크가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공간의 변화다. 그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대상은 모두- 그것이 꽃이든, 양이든, 풀 한 포기든, 조약돌 하나든-작품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풍경 속에선 어떤 것도 주변에 있지 않다.(68쪽)



‘어떤 것도 주변에 있지 않다.’ 이것은 대단한 인식이다. 내가 직접 모자이크화를 보지 않았지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 듯했다. 모두가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모자이크 화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인 것 같다.


모자이크 화에 대한 묘사 자체가 아름다움의 현현顯現 같아서 길지만 계속 옮겨보기로 한다.


그 아치형 모자이크가 공간과 관련해서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영원함이 시간과 관련해서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것은 공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소멸시킨다. 거기서 거리는 대상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모은다.
그 작품은 어떻게 그런 변모를 성취할 수 있게 된 걸까. 비밀은 모자이크에 쓰인 조각들과 빛의 작용 때문이다. 유리, 대리석, 혹은 광물로 된 작은 사각형들이 함께 놓이면서 특별한 시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걸까.
모자이크에 쓰인 조각들은 같은 색이라도 색조가 조금씩 다르다. 똑같은 조각은 하나도 없다. 그 조각들을 모르타르에 붙인(십사 세기 전의 일이다) 각도도 부분마다 다르다. 따라서 그 조각들이 반사하는 빛은 어느 부분에서는 맑고, 어느 부분에서는 어둡다. 이는 자연에서 흐르는 물 위에 빛이 비칠 때 일어나는 현상과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자이크 조각들을 붙여나간 선-곡선의 지붕을 따라 이어지는 조각들의 행렬-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하다. 그 선은 마치 장어처럼 나아간다.(68~69쪽)



장어 축제 기간 중이어서 그런지 존 버거는 모자이크 조각들의 행렬에서 장어 떼를 연상해낸다. 모자이크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깊이 있는 통찰이 느껴졌다. 그것은 모자이크화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글로써 모자이크화를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해놓았다. 그의 글에서 받은 느낌이, 직접 가서 그 모자이크화를 봤을 때의 감동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환상의 공간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구월 광장에서 연주되고 있는 다음 곡은, 파브리치오 데 안드레 Fabrizio De André의 「어부 Il Pescatore」이다. 존 버거는 이 노래의 후렴구인 ‘라 라라라 라라라 라’를 이 작품의 제목으로 붙였다. 모두 즐거운 축제를 한껏 즐기라는 듯이.

https://youtu.be/ijEHZufmKU8


존 버거가 깔아놓은 사유의 멍석에서 오랫동안 뒹굴며 게으르게 시간을 보냈다. 그의 글 속 미지의 장소를 탐색하고, 구월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에 함께 손뼉 치고 발 구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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