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아홉 번째 작품:<노래에 관한 몇 개의 노트>
야스민 함단을 위하여
존 버거는 야스민 함단의 공연을 보며 함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스케치를 했다.
가수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을 순간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 스케치는 온전한 그림은 아니지만 끼적거린 선들이 어떤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하다. 당시의 감정들이 불완전하게나마 꿈틀거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당신은 아주 가볍고, 건조하고, 희박한 어떤 존재 같았습니다. 늘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사람 같았어요. 노래를 시작하니 당신은 달라지더군요.
당신의 온몸이 더 이상 건조하지 않고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마치 액체를 가득 넘치게 부어 버린 병 같았죠.(71~72쪽)
노래가 그녀를 통과하는 순간, 그녀는 에너지 넘치는 존재로 변신했다. 그것을 보고 존 버거는 이렇게 놀라운 시각으로 표현했다. 그 자신이 화가여서 그런 것일까.
야스민 함단은 아랍어로 노래했다. 존 버거는 그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는 노래 한 곡 한 곡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가 노래로 전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개의 노트를 남겼다. 추상적인 어떤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생생하게 묘사한 그의 글은, 넋을 잃고 따라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한 곡의 노래는, 불리거나 연주될 때 하나의 몸을 얻는다. 실재하는 몸을 취하여 그 몸을 순간적으로나마 소유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노래는 반복해서 가수의 몸을 취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청중들의 몸은, 그 노래를 듣고 몸짓으로 따르는 동안 무언가를 기억하고 예측한다.
실재하는 몸을 취하지 않는 노래는 시간과 공간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노래는 과거의 경험을 전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리고 있는 동안 노래는 현재를 채운다. 이야기도 같은 작용을 한다. 하지만 노래에는 노래만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이런 끈질긴 희망이 없다면 노래는 존재할 수 없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73쪽)
빠르기, 박자, 반복음, 그렇게 반복하는 음악은 선적線的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안식처를 구축한다. 그 안에서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가 서로를 위로하고, 자극하고, 비꼬기도 하고, 영감을 주기도 하는 그런 안식처 말이다.(74쪽)
존 버거는 스페인 사진작가 타토 올리바스 Tato Olivas가 찍은 플라멩코 무용수의 사진을 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의 붓꽃 그림 연작 드로잉 중 그림 하나를 떠올린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과 그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고서 깜짝 놀랐다.
과연 기하학적 측면에서 무용수의 집중하고 있는 몸과 막 피어나려는 꽃 사이에 공통점이, 등가물이라 할 만한 것이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두 대상이 지닌 에너지와 두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 형태와 동작 그리고 움직임이 비슷했다.(78~79쪽)
그는 두 이미지를 스캔한 다음 타토 올리바스에게 보냈다. 그러자 타토는 붓꽃 드로잉과 더 닮은 다른 사진이 떠올랐다며, 전설적인 무용수 사라 바라스 Sara Baras의 사진을 보냈다. 그 사진을 보고 존 버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한쪽은 여인이고 다른 쪽은 식물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무용수와 붓꽃은 쌍둥이 같았다(...) 두 이미지 사이의 유사성은 내재적인 것이다. 거의 유전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이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서 보자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플라멩코 무용수의 에너지와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의 에너지는, 그럼에도 동일한 역학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둘의 시간 단위가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박동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둘은 무한할 만큼 떨어져 있지만, 리듬의 관점에서는 함께 움직이고 있다.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된 그 동작.’ (80~81쪽)
그의 글에서, ‘에너지’, ‘역학 법칙’, ‘박동’, ‘리듬’, ‘동작’이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 이런 말들의 공통성은 ‘살아있음과 움직임’이다. 이것은 꽃과 무용수를 관통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전혀 이질적인 두 존재를 꿈틀거리는 역동성으로 바라본 시선이 놀랍고도 신선하다.
그는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큰 소리로 전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를 통해 이름 없는 어떤 사건을 익숙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가까움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한 가까움은 함께 나누었던 경험의 양과 연관시키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밀함을 공유할 수 있다. 주고받는 눈빛에 담긴 친밀함, 끄덕이는 고개, 미소,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에 담긴 친밀함. 몇 분 동안 노래 한 곡이 불리고, 거기에 함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가까움. 삶에 대한 어떤 합의. 아무런 조건도 없는 합의. 노래 주위에서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결론.(84쪽)
노래를 들을 때 사람들은 심리적인 무장 해제 상태로 접어든다. 그리고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순수한 감성들이 발현된다. 즉 삶에 대한 아무런 조건 없는 합의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래는 가난한 우리의 어휘를 풍성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자연스럽게 걷어준다. 여기에 노래의 위대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모야 캐넌의 「노래를 지니다 Carrying the Songs」라는 시를 옮겨본다. 그의 시에는, 존 버거가 노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지니고 갈 다른 것이 없는 자들이 언제나
노래를 지니고 갔지
바빌론으로
미시시피로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 마지막 남은 이들 중에는
자신의 몸뚱이마저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삼 세기쯤 후, 아프리카에서 전해진 심오한 리듬이
그들의 심장과 뼈에 실려 온 그 리듬이
세상의 노래들을 전하지.
우리 동네를 떠난 이들,
다우닝스가와 로스가를 떠난 아가씨들
세틀랜드에서 온 청어잡이 배를 따라간,
은빛 물살을 헤집으며 떠나간 아가씨들이나
데리의 배를 타고 떠나간 라나파스트 출신의 청년들
합숙소의 그물 침대에서 잠을 자던 그들이,
마음속에 지닌 거라곤 노래밖에 없었지
그들이 마음속에 지닌 그 순수한 철 덩이를
황금과 교환할 생각이었지,
다른 노래들도
그들이 타고 있는 배의 전나무 바닥에 떨어지며
환한 진실의 소리를 퍼뜨리지.
존 버거는 야스민 함단의 노래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노래에 관한 심오한 사유를 여러 갈래로 전개하며, 독자들을 그 노래의 세계로 초대했다.
나는 그 깊은 사유의 물결 속에서 출렁이고 흔들렸던 시간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