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열 번째 작품:<은빛 조각>
존 버거는 며칠 전 천국을 그린 그림 앞에 서 있었고, 가만히 서서, 숨을 헐떡이며, 천국으로 들어갔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며칠 전, 알고 지낸 지 삼십 년쯤 되는 체코 출신의 화가 친구 로스티스라프 쿠노프스키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그는 거기서 친구의 최근 작품들을 보고 싶었다.
친구는 존 버거에게 여러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친구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은’ 연작들을 그리고 있었다.
이 연작들에 담긴 시점을 그려 보려면, 교외 지역이나 빈민가 혹은 사층에서 육층 사이의 아파트 단지가 몇 킬로미터 펼쳐져 있는 지역을 낮게 비행하는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광경을 상상하면 된다. 거리들이 만들어내는 선은 규칙적인 직선일 때도 있고, 가끔은 공터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축 현장 때문에 이상한 모양이 되기도 한다. 로스티아는 하늘에서 본 시점으로 그림을 그린다.(99쪽)
존 버거는 그 그림들에는 수천 개의 삶과 수천 개의 고독이 가득 담겨 있다고 생각했고, 그 그림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본다고 했다.
존 버거는 친구가 길거리 벽화 화가들의 장비와 거장의 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는 몇 년째 작업 중인데도 그 그림들이 여전히 아직 미완성이라고 했다. 존 버거는 친구가 우리 시대의 위대한 화가들 중 하나라고 확신했지만,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고려해 줄 큐레이터나 미술상美術商은 아직 찾지 못했다.
친구는 존 버거에게 최근에 그린, 가장 큰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 작품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은’ 연작 중의 하나였다. 그림의 제목은 <천국>이었다.
보잘것없는 교외 지역의 모습이 보이고, 하늘에 그려 넣은 책장에는 책이 몇 권 있다. 그중 한 권이 펼쳐져 있다. 알 수 없는 약어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하늘 높이, 나뭇잎과 가지와 열매가 그려져 있다.
헬리콥터는 천사로 바뀌어 있다. 희망으로 반짝이는 은빛 숨결이 비눗방울이 되어 허공에 떠다닌다. 회색이 있던 자리의 색감도 더 편안해졌다. 지상에 있는 건물들의 사각형 창 하나하나는 그대로 영혼이 된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앞에 참을 서 있다가 작품 안으로 들어갔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101~102쪽)
존 버거는 친구의 그림 앞에 서서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그의 영혼은 그림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한 영혼이 다른 한 영혼을 초대한 순간이었다. 나는 진정한 예술은 영혼과 영혼을 만나게 한다고 믿는다.
존 버거처럼 말 잘하는 작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작품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 진짜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 시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사실은 인정을 받는 예술가들이 극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자기 작품에 몰두한다. 그들이 작품에 열중하는 것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창작의 즐거움에 빠져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비록 현실은 곤궁할지라고, 그들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극한 즐거움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바라건대, 예술가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열한 번째 작품: <망각에 저항하는 법>
존 버거는 자연의 형태들-나무, 구름, 강, 돌멩이, 꽃 같은 것들-을 텍스트로 읽어내 보려고 했다.
그건 어떤 에너지가 지닌 서로 다른 리듬과 형태에 반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몸의 활동이었다. 나는 그 리듬과 형태들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 어떤 언어로 씌어진 텍스트라고 상상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텍스트의 흔적을 좇는 동안 나는 내가 그리는 대상과 한 몸이 되었고, 그것들이 써진 언어 한계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 모국어와 하나가 되었다. (104쪽)
존 버거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가 정보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은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므로,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들은 시민들이 기억상실에 빠져들게 하고, 과거와 미래를 보지 않고 불확실한 현재에만 살게 하는 망각 상태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존 버거는 그는 이런 망각의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렇지만 그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설명했듯이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석기시대 이후로 선조들이 우리들을 위해 남겨 둔 증언들이 있고, 꼭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우리가 목격한 것들을 보며 버텨 온 우리는 아직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 저항하고, 계속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연대 안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언어로 칭찬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109~111쪽)
이 작품은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이었고, 완전히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문장과 문장들 사이의 맥락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 그 비어있는 공간을 채울 수 있는 나의 제반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이중의 어려움에 처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나의 이해를 기반으로 했다기보다는, 텍스트의 정리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심오한 사상 또한, 가장 풍성하게 많았다.
그는 자연과 우주의 텍스트에 대해서 논했고,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아쉽게도 내게는 그 부분이 굉장히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부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는 111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인데, 그 안에 11개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그런데 행간을 읽어내는 노력 없이는, 읽어내기가 그리 쉽지 않은 책이다. 그것이 내가 이 짧은 책을 여러 차례 나누어 정리한 이유이다. 다 읽고 나서도 이 책을 과연 얼마나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일단은 존 버거의 책을 접한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부족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을 보면 여전히 호기심이 발동한다. 다시 새로운 고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청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