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한길사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한나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했다. 그녀는 1963년 <뉴요커 The New Yorker> 잡지 2월호와 3월호에 이 재판 내용을 실었다. 그때 이 책의 내용이 요약된 형태로 처음 출간되었다고 한다.


한국어판 책은 역자 서문과 미국 모라비언 대학 명예교수인 정화열 교수의 <악의 평범성과 타자 중심적 윤리>, 아렌트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말', 제1장 정의의 집~제15장 판결. 항소. 처형, 그리고 아렌트의 에필로그와 후기로 이루어져 있다.

책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읽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히만의 전쟁 동안의 행적과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재판받고 처형되기까지의 거의 모든 과정이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앞부분 정화열 교수의 글과 뒷부분 한나 아렌트의 후기만 정독해도 이 책의 핵심은 거의 파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 형식의 긴 내용을 읽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유럽 국가의 분위기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개인적으로는 잡념을 없애는 일종의 명상 상태였다고 나 할까. 굳이 그 시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자면 말이다.




이 책은 악한 아이히만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심리학적 분석 같았다.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스스로는 이상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이 약해서 다친 사람의 깊은 상처조차도 쳐다보고 있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도 전혀 죄책감이 없었다. 그는 다만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인간이라면 고유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아이히만의 경우에는 그런 사고를 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 이유가 교육의 부족 때문이었는지 천성적으로 지능이 떨어져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심리학자들의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것 같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했다. 그는 특별하게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런 아이히만에게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추출해냈다. 이건 대단한 심리학적인 고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평범한 인간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을 말함이다. 이런 현상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가질 때, 즉 타자를 고려하지 않을 때, 주로 나타나기 쉽다. 공감능력의 결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모든 인간에게는 아이히만 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간은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게 느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 절대적으로 선한 희생자이고, 독일인이 절대적으로 악한 가해자는 아니라고 했다. 아렌트의 이런 시각은 당시 유대인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그녀의 책은 유대인에게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악덕한 것이 되기도 했다.


그런 파격적인 주장을 한 그녀는 정말 용감하고 뛰어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는 지적으로 뛰어나기도 해야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나 아렌트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워낙 심오한 내용을 다룬 책이어서 완전한 이해를 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정화열 교수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화열 교수는 요즘 세상이 '미디어(매체)가 메시지가 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을 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라고 했다. 아이히만의 생각 없음이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볼 때, 미래에도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성을 요구하는 전체주의 사고방식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섬뜩하게 느꼈다.

전체주의는 '무사유'를 요구했고 그런 '무사유'는 재앙을 일으켰다. 첨단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전체주의 사고는 더욱 심해질 것이고, 미래에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정화열 교수의 지적에 동감하면서도 두려워졌다. 결국은 인간성 회복의 문제가 선결문제인 듯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은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둠이라는 것은 결국 빛이 있을 때 생기는 상대적 개념일 테니까. 아직은 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빛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 어둠을 밀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 빛이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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