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울 땐 독서
<폭력의 위상학>을 통해서 본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삶.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한없는 욕망을 부추긴다. 그 욕망은 물질적인 것으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돈’이다. 돈이면 거의 모든 것이 다 되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의 목적이 ‘돈’으로 귀결된다. 돈을 가지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사실은 아닐지라도.
한병철의 <폭력의 위상학>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한 글을 읽으며 공감했다.
돈 혹은 자본은 죽음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심층심리적 층위에서 자본주의는 실제로 죽음 및 죽음의 공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의 원시적 차원은 이 점에서도 나타난다. 축적과 성장의 히스테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호 제약 관계에 있다. 자본은 응결된 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돈으로 남에게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한 자본은 무한한 시간의 환상을 낳는다. 자본의 축적은 죽음, 즉 시간의 절대적 결핍에 대항한다. 기한이 있는 삶의 시간에 직면하여 인간은 자본 시간을 쌓아 올린다. (34~35쪽)
인간은 ‘돈’으로 영생을 꿈꾸는가? 자본주의는, 돈이 모든 절대적 가치로 환원이 될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래서 죽음까지도 피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한다.
영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자본주의는 ‘왜?’가 없는, 목적을 위한 목적을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욕망은 그저 더 큰 욕망을 부를 뿐, 욕망의 사전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매우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끝없이 ‘더 많이!’를 외치며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자본주의 엔진의 과속과 과열을 멎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성과 주체는 최대의 성과를 향한 자유로운 강박에 몸을 내맡긴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환상을 동반하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다.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다. 여기서 착취는 지배 없이 이루어진다. 자기 착취가 효과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가속화를 위해 타자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해야 한다’에서 ‘할 수 있다’로 전환한다. 성과 주체는 역설적 자유 속에서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이때 자유와 폭력은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자유인 homo liber를 자처하는 성과 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드러난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이기도 하다. 성과사회에서도 주권자와 호모 사케르는 서로가 서로를 낳는 역설적 논리 속에 엮여 있다. (196쪽)
조르조 아감벤에 의하면 로마시대의 특이한 수인(囚人)이었던 '호모 사케르 homo sacer '란 사회적, 정치적 삶을 박탈당하고, 생물적 삶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를 뜻한다. 풍요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자본주의 체제는 개인을 자유인 homo liber 이 아닌, 호모 사케르 homo sacer의 삶을 살게 한다. 무한한 성과를 위해 자본주의는 체제를 돌리는 엔진을 과속시켰고, 결과적으로 엔진이 과열되었다. 개인은 스스로를 소진 burn out 시키게 된다.
이 미친 폭주를 멎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요즘 부쩍 건강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어서 그런지 TV 등의 매스컴에서 ‘건강과 좋은 음식’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많이 다룬다. 이 채널, 저 채널 할 것 없이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다. 채널을 굳이 확인해보지 않으면 다 같은 채널로 알 정도로 개성이 없다. 물론 건강하면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건강에 대한 맹목적이고 광적인 집착은 삶의 공허함을 더욱 드러내는 것 같다. 이에 대한 한병철의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산출한다는 환상을 먹고 자란다. 삶과 죽음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경직된 태도는 삶 자체를 유령처럼 경직된 분위기로 뒤덮는다. 삶을 생물학적 생명의 과정으로 환원하는 것은 삶 자체를 벌거벗기는 결과를 낳는다. 단순한 생존은 외설적이다. 이로써 삶은 생기를 잃는다. 생기는 단순한 생물학적 의미의 활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다. 삶이 한 조각 주화처럼 벌거벗겨지고 모든 서사적 내용을 상실할 때 광적인 건강 숭배가 일어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공동체적인 것이 침식됨에 따라 남은 것은 오직 나의 몸뿐이기에, 이 몸만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적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주목받기를 갈망하는 자아의 전시가치와 건강 가치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벌거벗은 삶은 무엇 때문에 건강해야 하는지를 답해줄 모든 목적론, 모든 ‘위하여’를 파괴해버린다. 건강은 자족적인 가치가 되며 모든 내용을 상실한 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에 빠진다. (36~37쪽)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참으로 난제인 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물질세계의 화려함에 너무 오랫동안 눈멀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행복한지, 그저 길을 잃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 자신도 그런 무리 속의 한 명이다.
그래서 길 잃은 사람들에게 앞을 환하게 밝혀줄 현자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려본다.
이 시대라고 현자가 없겠는가? 다만 내 눈이 어두워 누가 현자인지를 알아보지 못할 뿐.
사실 이 모든 투덜거림은, 내 삶에 확실성을 갖지 못한 데에 대한 갑갑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