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조르조 아감벤/책세상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적 단상집이다.

책의 부제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읽기와 쓰기에 관한 글들이다.

깊이가 있는 글들이었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았다. 각각의 단상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놓고, 시간을 두고 그 의미를 되새겨봐야겠다.



<불과 글>

불과 글, 신비와 서사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한 요소의 실체가 다른 요소의 상실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하고 부재를 증언하면서 그것의 그림자와 추억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키는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불가능한 과제 앞에 선 예술가의 상황을 단테 Alighieri Dante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신곡》, <천국편>, 13곡 77~78절).



<관료주의적 신비>

죄와 벌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와 일치한다. 인간이 감수하는 벌뿐만 아니라 4만 년 전부터(즉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을 상대로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재판 또한 사실은 말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을 취한다’는 것, 스스로와 사물들의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스스로와 사물들을 알고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죄와 벌의 구속력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지상의 모든 법률 조항들 가운데 최후의 법령은 이런 식으로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언어가 곧 형벌이다. 언어 속으로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하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죄의 분량에 따라 쇠해야 한다.”



<비유와 왕국>

우리가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말들의 의미, 말들의 모든 모호함과 미묘함을 파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왕국, 즉 하늘나라의 근접성과 세상과 왕국의 유사성을 깨닫는 일이며, 하늘나라가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상과 너무 가깝고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왕국의 근접성은 하나의 요구이며 세상과 왕국의 유사성은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말이 우리에게 비유로 주어진 것은 사물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좀 더 가까운 곳에 머물기 위해,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얼굴에서 닮은 점을 발견하거나 누군가의 손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처럼, 좀 더 가까이 머물기 위해서다.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이 스스로의 존재 속에 보존되기를 욕망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사물은 동시에 이러한 욕망에 저항하며 짧은 순간이나마 욕망을 무위적으로 만들고 관조한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여전히 욕망에 내재하는 저항력, 노동에 내재하는 무위다. 이 무위만이 코나투스에 코나투스의 정의와 진실을 부여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위만이(적어도 예술 분야에서는 이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예술에 품격을 부여할 수 있다.



<소용돌이>

액체가, 다시 말해 존재가 취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상은 물방울과 소용돌이다. 물방울은 액체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황홀경에 빠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물은 떨어지거나 흩어지면서 물방울로 분리된다). 소용돌이는 액체가 스스로를 향해 집중되는 지점, 회전을 통해 자신의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지접에서 발생한다. 세상에는 물방울-인간과 소용돌이-인간이 존재한다. 물방울-인간은 안간힘을 써서 바깥으로 분리되려고 노력하는 인간, 소용돌이-인간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몸을 휘감으며 더욱더 안쪽을 향해 뛰어넘기를 계속하는 인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물방울도 물속으로 떨어지면서 일종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못을 형성하면서 관능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집트에서의 유월절>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절기를 이집트에서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첼란이 그가 시를 써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와 그의 시적 과제가 안고 있는 불가능성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이, 즉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동시에 침묵의 흐름 속에서 시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과제(‘이방인’이었던 잉게 코르크가 처음부터 끝까지 매번 동의했던 과제)가 이집트에서의 유월절과 관련지어 검토될 때 특별한 방식으로 빛을 발하리라고 믿는다. ‘이집트에서의 유월절’은 그런 의미에서 파울(페자흐) 첼란의 모든 작품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제목이다.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

생각한다는 것은 글을 쓰거나 읽는 동안 백색 페이지를 떠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료를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망가넬리와 말라르메의 책들이 ‘책’을 백색 페이지라는 순수한 질료의 상태로 가져가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듯이, 컴퓨터 사용자는 이 화면, 이 물리적인 ‘장애물’, 이 형태 없는 것이(모든 형태는 그것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끝내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남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물질적인 성격에 대한 관념의 허구를 중성화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삶이나 작품이 아닌 행복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삶의 형태란 한 작품을 위한 작업과 자기 연단을 위한 작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번역의 문제인지 심오한 철학의 문제인지, 우리말로 쓰인 부분이 왜 이렇게 미지의 외국어처럼 보이는지 정말 난감하다. 가끔 이런 책을 만날 때가 있는데,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 또한 나를 가르치는 스승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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