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김영민/사회평론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로 저자의 팬이 되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읽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의 글은 좀 시니컬하지만 야비하지 않고,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자들을 시선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이번에는 불후의 고전인 『논어』에 관한 에세이다. 『논어』라고 하면 왠지 쿰쿰한 냄새가 날 듯하다. 그런데 그의 글은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에필로그에서 그가 한 말에서, 내가 느꼈던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서문인 ‘매니페스토’에서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14쪽)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해 더 나은 통찰과 자극을 받을 수 있다면,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그러면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고전의 텍스트를 공들여서 읽는 일이 필요하다.

그는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먼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개념을 분명히 해주었다.


생각의 무덤을 우리는 텍스트 text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텍스트가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텍스트의 무덤을 우리는 콘텍스트 context,라고 부른다. 콘텍스트란 어떤 텍스트를 그 일부로 포함하되, 그 일부를 넘어 있는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의미의 공간이다. 죽은 생각이 텍스트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려면 콘텍스트를 찾아야 한다. 즉 과거에 이미 죽은 생각은 『논어』라는 텍스트에 묻혀 있고, 그 텍스트의 위상을 알려면 『논어』의 언명이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적 조건과 담론의 장이라는 보다 넓은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 (15쪽)



고전을 읽을 때 말한 부분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를, 그 당시의 문화적·역사적 환경까지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


텍스트를 정밀하게 독해(close reading) 하려면 기본적인 문해력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알아보게끔 문장의 양지에 드러나 있는 의미뿐 아니라 문장의 음지에 숨어 있는 의미까지 포착하려면 남다른 집중력과 훈련된 감식안이 필요하다. 이 정밀 독해의 방법이 가진 문제는, 양적 자료를 다루는 방법과 달리 일정한 절차로 정식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텍스트 정밀 독해의 관건은 정식화된 절차를 적용할 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독해를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마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공식화된 붓놀림의 절차를 밟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런 회화를 그릴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잘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종의 ‘동어 반복’이 텍스트 정밀 독해 방법의 핵심을 이룬다.(21~22쪽)


무척 어렵다. “텍스트를 잘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독자들은 이런 동어 반복의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그는 약간의 힌트를 제공한다.


텍스트 정밀 독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정식화된 절차를 외우는 대신, 상대적으로 더 훈련된 감수성을 지닌 독해자를 만나 그와 더불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 학생이 아무리 텍스트를 들여다보아도 별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없어 난감해할 때, 선생은 그 학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듣고 나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좀 전에 느꼈던 난감함은 텍스트를 좀 더 섬세하게 읽을 수 있는 감수성으로 발전할 것이다. (23쪽)


역시 어렵다. 혼자서는 힘들고 결국 더 나은 독해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독해자란 바로 선생일 것이다. 학생은 선생의 도움을 통해 간신히 난감함을 조금 해소할 수 있다.

그런 난감함을 해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침묵도 일종의 발화로 간주하며 텍스트를 읽어보라"라는 것이다.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낭독이자, 들을 수 있는 정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침묵을 듣기 위해서는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처럼 관점을 바꿀 수 있게 되면, 이제껏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했던 학생은 텍스트가 무엇에 대해 ‘구태여’ 침묵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26~27쪽)


지혜로운 독자가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텍스트의 입이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는 귀의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그런 감수성은 일생을 통한 배움과 부단한 노력으로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매니페스토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17쪽)


그가 ‘간신히’라고 표현했듯이,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 일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역사서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그대로 복제하는 데 치중하는 역사서는 모사의 관점에서는 훌륭할망정 창의적인 재현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진정으로 뛰어난 역사책은 해당 과거를 그대로 복제해서 전시하려 들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어떤 특질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설득력 있게 전달해 준다. 과거를 복제하려고만 드는 역사가는 늘 ‘더 진짜인’ 사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역사서가 얼마나 훌륭한 지는 사료를 얼마나 핍진하게 반복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사료는 필수 불가결한 밑바탕이지만,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221쪽)


훌륭한 역사서에 대한 정의를 ‘모사’와 ‘재현’의 관점을 통해서 잘 보여주었다. 이 또한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는 방법과 상통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논어』를 답습하는 ‘모사’의 관점이 아니라, 창의적인 ‘재현’의 관점에서 읽어본다면, 텍스트가 품고 있는 침묵의 의미까지 되새겨볼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넓어질 것 같다. 이런 독서 태도는 『논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책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저자가 구상하고 있는 논어 프로젝트 총 네 가지 저작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 논어 에세이를, 뒤이어 전개될 논어 이야기로 안내하는 초대장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겠다.

본격적으로 『논어』로 들어가기 전에, 『논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독서 태도와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미리 다루어준 것이다. 일종의 워밍업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논어 프로젝트는 1. 『논어』의 주제를 소개하는 ‘논어 에세이’ 2. 기존 『논어』 번역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어 번역 비평’ 3. 『논어』 각 구절의 의미를 자세히 탐구하는 ‘논어 해설’(총 10권) 4. ‘논어 번역 비평’과 ‘논어 해설’에 기초하여 대안적인 논어 번역을 제시하는 ‘논어 새 번역’이다.

방대한 프로젝트이다. 그렇지만 무척 흥미롭게 보인다. 아직 나오지 않은 그의 책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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