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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Sep 02. 2020

어금니와 이별하다

  -마음의 고샅길

  

 어제 왼쪽 아래 어금니를 뺐다. 한 달 전쯤 갑자기 음식을 씹기가 불편해져서 치과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의사가 아무래도 어금니 뿌리가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씹기가 불편해졌을 것이라고.

 치과에 갔을 때는 상태가 좀 괜찮아졌을 때였다. 상태가 좀 나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했더니, 의사는 좀 기다려보고 잇몸 상태가 계속 나빠지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동안 잇몸 상태는 좀 괜찮아지는 듯했는데, 지난주에 뭔가 딱딱한 것을 잘못 씹고 나서부터 통증이 심해졌다. 주말에는 잇몸에서 시작된 통증이 귀와 머리까지 흔들어놓았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금요일에 예약을 해놓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치과에 갔다. 요즘 치과에 예약하지 않고 가면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속적인 통증은 기다리는 지루함 정도는 가볍게 제압했다. 강한 것이 언제나 이기는 법이니까.


 마침내 발치했다. 이는 십오 년쯤 전에 이미 탈이 크게 나서 금으로 씌운 것이었다. 원래 시원찮은 이였으나 그동안 그럭저럭 견디어왔는데 이제 수명을 다 한 듯했다.

 마취를 하고 이를 뽑았으나 통증이 없지는 않았다. 마취 덕분에 겨우 참을만한 통증이었다. 의사는 이 뽑은 자리에 소독 거즈로 채워놓고 한 시간 반 동안 꽉 물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반쯤 지나서 임플란트 시술을 시작하자고 했다.


 집에 와서 이 뽑은 자리를 보니 잇몸이 폭발한 화산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몇십 년 동안 먹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던 나의 일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선시대 유 씨 부인은 겨우 바늘 하나를 부러트리고 나서 조침문弔針文을 썼는데, 나도 조치문弔齒文이라도 써야 하는 건 아닌가. 바늘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이를 잃고도 나는 그저 멍할 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나이 든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영 가버렸고, 가까웠던 친구들과 지인들도 심리적으로 점점 소원해졌다.

 새삼스럽게 회자정리 會者定離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회자정리는 사람들 사이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인연을 맺고 만난 모든 사람들, 동식물들, 물건 등에도 다 해당되는 말이다.


 기형도는 <빈집>이라는 시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읊었지만, 나는 이를 잃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육신의 노쇠함에 대한 회한을 느낄 뿐이다. 그동안 내 입속에서 완벽하게 내 것이었던 이가, 하루아침에 홀연히 내 몸을 떠나 가버렸다. 내 몸의 이도 이러할 진데, 세상에서 진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


 잠시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것들에게 너무 집착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집착을 놓기가 쉽지 않다. 내가 스스로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나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나를 버리고 가는 것이다. 나는 버리지 못했고, 다만 버림받았을 뿐이었다.


 어느덧 이별과 자주 만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별은 여전히 서먹한 슬픔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슬픔과도 익숙해져야 한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바라보듯이.


 잘 가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어금니야!*



*기형도의 <빈집>에 나오는 글귀.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를 내 식대로 바꾼 것임.




기차가 떠나 버린 선로는 쓸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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