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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Nov 02. 2020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장편소설/다산책방

  -외로울 땐 독서

 



 소설은 토니의 삶을 대체로 크게 인생 전반부 1부와 후반부 2부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다. 은퇴하고 동네 병원 도서 관리직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토니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한다.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나는 이제껏 재미있게 살아온 편이다... 나는 살아남았다...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어느 날 토니는 모르는 사무 변호 회사의 편지를 받았다. 젊은 시절 일 년 가량 사귀었던 여자 친구 베로니카의 엄마가 유산으로 그에게 오백 파운드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면서 사십여 년 전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는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베로니카는 토니의 친구인 에이드리언과 사귀었다. 그 두 사람은 토니에게 이런 사실을 편지로 알려 왔다. 토니는 쿨하게 그들을 떠나보냈고 기억 속에서 그들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 후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다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편지 한 장으로 그는 다시 과거를 더듬어 기억을 복기해보려고 한다. 그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돌려받기 위해서 베로니카를 만난 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베로니카는 예전에 그가 두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줬는데, 그 편지는 저주와 악담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그는 자기가 쓴 편지 내용을 사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일시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충동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토니는 자신의 독설 때문에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책 말미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반전이 있어서 잠시 멍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을 통해 줄리언 반스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됐는데,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스, 추리, 철학적 요소가 흥미롭게 버무려진 소설로, 맨부커상을 탈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마다 책을 통해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는 특히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고 편집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런 점이 탁월하게 잘 드러나 있다. '기억'이라는 대상을 통해 역사와 개인의 삶을 조명한 작가의 뛰어난 인식도 놀라웠다.


  젊은 시절, 수업 시간에 에이드리언이 헌트 영감에게 역사에 대한 정의로, 라그랑주가 한 말을 인용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 작품에서는 그런 역사에 대한 정의가  개인의 역사, 즉 개인의 삶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반전 때문에 앞부분으로  돌아가서 읽어봐야만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넘겨 버렸던 문장들이, 다시 읽어보니 환한 햇살 속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장치를 곳곳에 숨겨놓고 미소 짓고 있었을까.
 오랜만에 재미와 지적 욕구 모두를 충족시켜준 작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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