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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r 14. 2021

내 멋대로 시 읽어 보기 2

-마음의 고샅길

     담배 끊은 파이프



                         김희업



연기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입술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얼굴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사내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담배를 끊은 파이프의 쓸모는 뭘까? 

존재 가치를 굳이 찾는다면 ‘기억’ 일 뿐이다.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기억. 

파이프를 파이프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담배 피우는 사람이다. 그가 파이프에 담배를 꽂고 피울 때 파이프는 비로소 파이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파이프는 비어 있다. 빈 파이프를 채우고 있는 것은 상실감일 뿐이다. 파이프에 담배가 꽂히고 사내의 입을 통해 연기가 날 때 파이프는 비로소 살아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파이프는 주인 사내가 여기에 없어서 연기를 뿜을 수 없다. 연기를 뿜을 수 없는 파이프는 더 이상 파이프가 아니다. 존재 가치를 상실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한 때 서로 지극히 사랑했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 떠나 버렸다. 남아 있는 연인은 온통 떠나버린 연인을 생각하며 상심한다. 떠난 사람은 거기에, 남은 사람은 여기에, 각각 존재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지 않다. 

 담배 피우던 사내와 파이프는 각각 실존하지만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 둘이서 한 공간을 이룰 때와 각각의 공간을 따로 차지할 때, 그 공간을 채우는 밀도와 온도는 많이 다를 것이다. 이제 공간을 채우는 건 차갑게 응고된 과거의 ‘기억’ 일뿐이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이 빠져나갈 때, 한 사람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가벼워질까? 그 가벼워진 영혼은 흩날리는 눈발처럼 어딘가를 방황할 것이다. 그러다가 나무 위로, 바위 위로, 땅바닥으로 내려왔다가,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들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때 누군가의 자식이었다가, 누군가의 친구였다가, 누군가의 연인이었다가, 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부모였다가, 어느 날 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 lsportrait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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