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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r 13. 2021

내 멋대로 시 읽어보기 1

-마음의 고샅길

       밤의 고양이


                      유병록


자, 걷자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축하는 의미로

까만 구두를 신고


정오의 세계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지붕 위를 걷자

불빛을 걷어차면서


빛이란 얼마나 오래된 생선인가


친절한 어둠은 질문이 없고

발자국은 남지 않을 테니


활보하자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책하는 의미로

까만 구두를 신고

이 세계를 조문하는 기분으로







 안도현 시인은 ‘빛이란 상투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빛’이 상투성의 상징이라면, 시인은 당연히 상투성을 거부하고, 낯설고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시인은 ‘밤의 일원’이 되기로 한다. 밤은 까맣다. 그걸 상징하기 위해 ‘까만 구두’가 나온다. 또 까만 구두는 고양이의 발을 연상시킨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라 밤에 돌아다니니, 밤의 일원으로 고양이를 내세운 것이리라. 

 시인은 고양이로 상징되는 듯하다. 고양이는 정오를 경멸한다. 빛은 상투성이고 정오는 상투성의 세계이니 말이다. 

고양이는 지붕 위를 잘 걷고, 어둠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불빛을 걷어차는 것이다. 지붕 위에서 고양이가 날렵하게 걷는 모습이, 빛, 즉 상투성을 걷어차는 동작으로 재미있게 환치된 것 같다.

 빛이란 얼마나 오래된 생선인가’. 이 부분이 이 시에서 가장 뛰어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를 유혹하는 것은 생선이다. ‘오래된 생선’은 줄기차게 인간을 유혹하는 세속적인 대상이 아닐까. 


 ‘빛’은 대상이 드러나게 비추는 것인데, 훤히 보이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자기의 결점이나 과오는 감추고 가장 좋은 것만을 보이고 싶어 한다. 빛이 있는 정오의 세계에서 진실은 오히려 은폐된다. 그래서 빛이 있는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가식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빛은 아주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빛은 긍정적이고 환한 것을 상징하는데, 시인은 ‘빛’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비틀어서 오히려 은폐와 부정의 의미로 보고 있다. 시인은 늘 ‘낯설게 보기’를 하는 사람이다. 일반인과 시인의 경계가 이 지점에서 나누어지는 건 아닐까.


 ‘친절한 어둠’은 무슨 뜻일까? 어둠은 모든 것을 덮어주기 때문에 친절한 것이고, 시시콜콜 묻지도 않는다. 그리고 친절한 어둠 속에서는 ‘발자국은 남지 않을’것이다. 


 첫 행에서는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축하는 의미로’ 걷자, 고 했는데, 마지막 연에서는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책하는 의미로‘ 활보하자, 고 한다. ‘자축’과 ‘자책’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다. 

 밤은 진정성과 순수의 세계이므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된 것은 자축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자책은 왜 하는 걸까? 밤의 세계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세계이지만, 번쩍거리고 풍족한 현실과는 다른 세계여서 그럴까.


 한편 시인은 화려하고 현실적인 낮의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자신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일 뿐이라고 자책한다. 낮의 세계에 살아남지 못한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조문하기 위해 까만 구두를 신었던 것은 아닐까. 

 시인은 밤의 일원이 된 것을 자축하며, 또 낮의 일원이 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살아간다. 보통 사람들의 삶 또한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늘 현실과 이상 세계를, 추의 진자처럼 오가며 갈등하는 존재가 아닐까.






                                                                               © mrcagema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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