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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r 16. 2021

결: 거칢에 대하여/홍세화 사회비평 에세이/한겨레출판

-외로울 땐 독서


저자가 서문에서 쓴 글이, 이 시대의 인간상을 콕 집어낸 것 같아서, 가슴이 뜨끔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자유나 사람됨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의 소유물과 그가 속한 집단, 계층에 관심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가 가진 구매력이기 때문이다.( 15쪽)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계속 노예로 편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편하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 앞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는 점점 더 힘을 잃고 있다. (17쪽)

 

 우리는 너무 많은 물질적 욕망 앞에서, 회의하는 자유인이기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편한 노예의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과연 인식하며 살고 있을까?

 저자는 ‘나를 짓는 자유’라는 특이한 표현을 했다. 그는 ‘짓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짓다’라는 우리말 동사는 흥미롭다.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는다’고 써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가 모두 ‘짓다’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된다. 의식주의 부족은 ‘춥고 배고픔’의 비참함을 가져온다. 잘 짓고 고르게 나누어 이 세상 사람 중 누구도 ‘춥고 배고픔’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춥고 배고픔이라는 가난과 그런 결핍 상태의 지속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한다.(22쪽)


 ‘짓다’라는 동사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다루는 행위라면, 그 ‘짓다’라는 동사의 목적어에 ‘나’를 두는 일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나’라는 존재는 정말 소중하다. 일단 내가 존재해야 세상이라든가, 삶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중한 존재인 ‘나’를 잘 지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무한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저자는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외로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외로움과 함께 밀려오는 심리적 불안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자유는 외로움과 불안의 조건 아래 얻을 수 있으므로 자유인은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하며, 심리적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 외로운 존재인 나를 대면하는 또 하나의 나를 상정하여 그 둘 사이에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외롭고 불안한 나를 자유로운 존재로 지킬 수 있는 길의 하나다. 여기서 ‘소리 없는 대화’의 주제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지향일 것이다. 그것의 고갱이를 나는 사랑이며, 참여와 연대라고 말하다. 그런 고갱이를 자기 내면에 탄탄히 간직한 사람일수록 자유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외로움과 심리적 불안을 잘 이겨낼 수 있다. (25~26쪽)


 자유를 위해서는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심리적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독립성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면의 자아와 ‘소리 없는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어야 한다. 그 대화의 고갱이는 사랑, 참여, 연대다. 

이런 행위를 통해 비로소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자유는 절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자유를 ‘제멋대로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않았던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외로움과 불안’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간과하지는 않았던가.

 아니면, 그런 ‘외로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성적인 성찰과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물질적 부에 쉽게 기대려고 하지는 않았던가. 그리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어지는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회적 차별의 고착화에 기여하지는 않았던가. 



 자유의 조건인 외로움과 불안이 버거워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사람에게 그 외로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그의 소유물과 그가 속한 집단이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반성적 성찰과 실천을 하지 않는 사회는 사회 비판 의식이 결여되어 뻔뻔한 지배 집단과 시시한 피지배 집단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부의 크기와 소속 집단이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 가난한 사람·장애인·여성·성소수자·이주노동자·난민은 가진 자·비장애인·남성·이성애자·내국인의 우월성을 확인해 주는 존재가 된다. 차별, 억압, 배제가 횡행한다. (30쪽)

 

 자유에는 여러 함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짓는 자유는 ‘고결한 인간다움’의 의미에 방점을 찍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고결함은, 완성되지 않은 자아에 대해 늘 회의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비단결이 고운 것은 올이 많아 섬세하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사유의 올들에 하나의 올이라도 더 보태거나 수정하여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함이다. 그는 ‘회의하는 자아’다. 회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짓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고쳐 짓거나 새로 지을 게 없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인이 ‘회의하는 자아’로서 지향하는 고결함은 제로섬 게임이 적용되는 고귀함과 다르다. 고귀함은 ‘귀함’이 뜻하듯 태생적으로 선택된 사람이거나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다. 고귀함은 그 반대편에 비천함을 필요로 하지만, 고결함은 그렇지 않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비루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고결함은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니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며 선물이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고결함을 가로막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고결함으로 이끈다. 설령 결이 다르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의 곱고 섬세한 결을 느끼며 향유할 수 있다. (34~35쪽)


 여기서 책 제목인 ‘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와 너의 결은 서로 다르다. 누구의 결이 더 우위에 있지는 않다. 인간 존재는 누구나 다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를 고결하게 여길 수 있다.


 이 책이 사회비평 에세이인 만큼 책에서는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 관한 것이고, 또 그 사람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짧게나마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자의 깊고 넓은 사유의 바다에서 퍼 올린, 겨우 한 줌의 물에 대해서 말했으니, 실로 내가 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책에서 만난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가슴에 새기며 글을 맺는다.  




           자유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자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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