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언제고 아이들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라. 아이들이 방 한쪽에서 조용하고 진지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라. 거기에는 어른들의 격려나 평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이들은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자기들끼리만 뚝 떨어져 있는 듯하기도 하다. 아이가 없다면 곤히 잠든 애인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모습 모두에서 우리는 완전한 즐거움을 본다. 그들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지각 없이 순전히 놀이에 또는 잠에 빠져서 스스로 즐거움을 얻고 있다. 그러다 문득 당신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영심 가득한 자아가 얼굴을 드러내고 인정을 갈구하며 관심을 끌려는 일상의 서커스로 되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사랑스러움의 순간, 강렬하지는 않지만 비할 데 없이 평온한 순간. 그런 순간에 우리는 맨 먼저 무엇을 느낄까?
'드러내지 않기 discrétion’*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찰나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그 기쁨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드러내지 않기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하나가 있다. 여기 내 앞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조용히 음미하려면, 말 그대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등장을 즐기려면, 사실 나는 일정 시간 동안,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예되어야 한다. 그 유예는 ‘이전’에서 ‘이후’로 나아가는 시간의 질서 속에서의 멈춤, 그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이어야 한다. 또한 그 유예는 일정 시간 이상 연장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가치가 있다. 지나쳐서는 안 된다. (8~10쪽)
드러내지 않기에 대한 사랑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타자에게로 향해 있고 열려 있는 고독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이미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아마 드러내지 않기야말로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의 발단이 되는 경험일 것이다. (133쪽)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은 알아봐 주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 다수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망과 짝을 이룬다. 달리 말해서 이 시대의 현대성은 자신을 드러내며 인정받고자 하는 광적인 투쟁뿐 아니라, 익명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은밀한 투쟁, 좀 더 차분하지만 실로 완강한 투쟁으로도 특징지어진다(...) 이 꿈들은 서로 모순되는 별개의 꿈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시대의 두 얼굴로 봐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허영과 자기 중심주의의 독약에는 드러내지 않기라는 해독약이 있다고 하겠다. (16~17쪽)
사랑은 아마도 드러내지 않기의 유일한 ‘질료’ 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사랑에 적절한 모습을 부여하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게 처신한다.(163쪽)
사실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삶의 유일한 본질적 가치, 특히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든, 소년들에 대한 사랑이든-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다. (166쪽)
진정한 드러내지 않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보이지 않게 하면서 남을 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볼 수 있는데도 보지 않고, 때로는 보기는 보되 타자의 자유를 조금이라고 침해하거나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앗아가는 일이 없게끔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 바로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주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내주되 드러내지 않으며, 알아차려주되 지배하지 않는 것을? (164쪽)
사랑이 드러내지 않기의 ‘질료’라면 그 이유는 드러내지 않기가 자유롭고 의연한 사랑의 유일한 ‘형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드러내지 않기 없이는 사랑도 없다. 진실한 사랑은 드러내지 않는 사랑일 뿐이다.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