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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y 15. 2021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피에르 자위/위고

  -외로울 땐 독서



책 내용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제목에 이끌려서 읽게 된 책.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 수준으로 읽어내기 힘든 철학서였다. 철학에 관한 기본 소양이 없는 내가 읽기에는 난감했지만, 가끔씩 양념처럼 나오는 저자의 아름다운 글에 매료되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책 내용은 아주 극히 일부분만 이해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저자가 퍼 올린 철학의 큰 물동이에서 그저 물 한 모금만 맛본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사실 ‘들어가는 글’ 초입의 글들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드러나지 않기’의 예들이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워서, 한 편의 멋진 수필을 읽는 것 같았다.  


언제고 아이들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라. 아이들이 방 한쪽에서 조용하고 진지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라. 거기에는 어른들의 격려나 평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이들은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자기들끼리만 뚝 떨어져 있는 듯하기도 하다. 아이가 없다면 곤히 잠든 애인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모습 모두에서 우리는 완전한 즐거움을 본다. 그들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지각 없이 순전히 놀이에 또는 잠에 빠져서 스스로 즐거움을 얻고 있다. 그러다 문득 당신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영심 가득한 자아가 얼굴을 드러내고 인정을 갈구하며 관심을 끌려는 일상의 서커스로 되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사랑스러움의 순간, 강렬하지는 않지만 비할 데 없이 평온한 순간. 그런 순간에 우리는 맨 먼저 무엇을 느낄까?
 '드러내지 않기 discrétion’*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찰나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그 기쁨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드러내지 않기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하나가 있다. 여기 내 앞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조용히 음미하려면, 말 그대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등장을 즐기려면, 사실 나는 일정 시간 동안,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예되어야 한다. 그 유예는 ‘이전’에서 ‘이후’로 나아가는 시간의 질서 속에서의 멈춤, 그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이어야 한다. 또한 그 유예는 일정 시간 이상 연장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가치가 있다. 지나쳐서는 안 된다. (8~10쪽)


 이 글에 반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내용이 난해했다. 난해한 본문으로 유인하기 위한 저자의 작전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래도 일단 읽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전체주의적 팬옵티콘의 감시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는 현대사회에서 ‘드러내지 않기’는 저항의 발단이 되는 경험일 것이라고 말한다.


 드러내지 않기에 대한 사랑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타자에게로 향해 있고 열려 있는 고독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이미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아마 드러내지 않기야말로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의 발단이 되는 경험일 것이다. (133쪽)


 다양한 미디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개인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익명성 속으로 달아나기도 한다.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은 알아봐 주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 다수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망과 짝을 이룬다. 달리 말해서 이 시대의 현대성은 자신을 드러내며 인정받고자 하는 광적인 투쟁뿐 아니라, 익명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은밀한 투쟁, 좀 더 차분하지만 실로 완강한 투쟁으로도 특징지어진다(...) 이 꿈들은 서로 모순되는 별개의 꿈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시대의 두 얼굴로 봐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허영과 자기 중심주의의 독약에는 드러내지 않기라는 해독약이 있다고 하겠다. (16~17쪽)

 

이런 복잡한 사회에서 ‘드러내지 않기’는 일종의 해독약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러내기’와 ‘드러내지 않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심오한 철학론에 입각해서 ‘드러내지 않기’에 대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여러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소환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내 가슴에 와 닿은 몇몇 문장들만 간직하고자 한다. 특히 사랑에 관한 철학적 정의들이 좋았다.


 사랑은 아마도 드러내지 않기의 유일한 ‘질료’ 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사랑에 적절한 모습을 부여하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게 처신한다.(163쪽)


 진정한 사랑은 한없이 고요한 것. 어쩌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그저 조용히 지켜봐 주고 ‘드러내지 않는’ 것 인듯하다.


 사실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삶의 유일한 본질적 가치, 특히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든, 소년들에 대한 사랑이든-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다. (166쪽)



 진정한 드러내지 않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보이지 않게 하면서 남을 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볼 수 있는데도 보지 않고, 때로는 보기는 보되 타자의 자유를 조금이라고 침해하거나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앗아가는 일이 없게끔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 바로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주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내주되 드러내지 않으며, 알아차려주되 지배하지 않는 것을? (164쪽)


 사랑의 정의를 이렇게 아름답고 적확하게 표현하다니! 그런데 과연 이런 완전한 사랑이 가능할까? 그러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이다.


 사랑이 드러내지 않기의 ‘질료’라면 그 이유는 드러내지 않기가 자유롭고 의연한 사랑의 유일한 ‘형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드러내지 않기 없이는 사랑도 없다. 진실한 사랑은 드러내지 않는 사랑일 뿐이다. (67쪽)



 세상에 이런 진실한 사랑은 있을까? 내 수준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사랑은 짝사랑뿐인 것 같다. 그렇지만 어디엔가는 진실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성스러운 사랑 같지만. 그래도 그런 사랑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책 읽기를 했다. 저자의 심오한 주장과는 동떨어진, 너무 얄팍한 감상만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책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걸어주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내 수준이 그렇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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