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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Jun 01. 2021

 나 홀로 읽는 도덕경/최진석 지음/시공사

  -외로울 땐 독서


 언제부터인지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늘 『도덕경』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최근 도서관 서가에서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더구나 저자가 최진석 선생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는 말’을 읽어 보았다.


 아무리 높은 평가를 받는 고전이라도 숭배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숭배하지 않기 힘들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키우는 연료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고전은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소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소장자보다는 소비자가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홀로 읽기’라고 해보죠.(8쪽)


 고전을 숭배하지 말고 자신을 키우는 연료로 사용하고, 고전을 소장하지 말고 소비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내게는 고전은 늘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 감히 소비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서 이런 놀라운 깨달음을 주는 존재가 내 주변에서는 거의 없다. 한정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내게, 책이야말로 진짜 좋은 선생일 수밖에 없다.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을 ‘나 홀로’ 조금씩 책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혀놓았다. 『도덕경』을 혼자 공부한다는 독자를 만나서, 『도덕경』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받고 그 질문에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이 되었다고 했다.


 책의 구성은 1부에서는 『도덕경』의 내용 중 꼭 알아야 할 내용을 묻고 답하는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어떤 주와 해설이 없는 『도덕경』 원문과 번역문을 실어놓았다.


 어떤 한 사람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노자나 공자는 그런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지적인 태도로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예민함을 가졌던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을 철학자, 시인, 예술가, 과학자라고 하지요. 지적 예민함으로 무장한 관찰자들, 그 시대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시대가 어떻게 새롭고 더 나은 사회로 진화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21쪽)

 


-철학자, 시인, 예술가, 과학자의 정의가 굉장히 멋있다. 어떤 한 사람이 어떤 태도로 한 시대를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지적 예민함’으로 무장한 관찰자들이 많은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사람들 같다. 있는데 내가 눈이 어두워 못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노자와 공자를 동양 최초의 두 철학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이미 있던 믿음 체계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으로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이에요. 철학의 등장은 믿음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로 넘어온 것을 의미해요. 믿음의 시대에 높은 수준의 생각을 써놓은 것이 신화, 인간의 시대의 높은 수준의 생각을 써놓은 것이 철학입니다. 공자나 노자를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둘 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의미가 제일 강해요. 천명을 극복하려고 덤빈 것이죠.   역사와 시대의 주도권을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부터 뺏어 와서 인간에게 선물한 사람들입니다.  (24쪽)


 -동양 최초의 두 철학자인 노자와 공자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듯한 정의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절대 신에 대한 믿음에서 독립해서 역사와 시대의 주도권을 인간에 준 사람’이라는 표현은, 간결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역시 최진석 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 Thought 은 인간이 살면서 판단과 추리를 거쳐 갖게 된 의식 내용이자 어느 정도 통일성을 갖춘 인식 체계이고, 사회 및 인생에 대한 일정한 견해입니다. 사상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원리라기보다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주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등을 따지면서,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앎은 어떤 경로를 겪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 등이 서로 연관성을 갖고 체계를 이룬 고도의 추상적인 사유입니다. 예를 들면 , 신채호 선생님 같은 분은 사상가이지 철학자는 아니시죠. 사상보다는 철학이 훨씬 철저한 인식이자 추상적인 인식입니다. 사상은 철학보다 덜 보편적이고, 철학은 사상보다 더 보편적이죠. (28쪽)


 -‘사상’과 ‘철학’에 대해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선생의 이런 간결한 해설 덕분에, 나 같은 문외한이 ‘홀로’ 『도덕경』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었다고 물론 다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편안하게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직관과 통찰에 이르게 하는 언어의 힘이 『도덕경』에 있어요. 산문은 글 자체로부터 직접적인 감동을 얻기가 쉽지 않아요. 산문을 통해 우리는 의미를 발견하고 또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데 사실 이런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한 가지 해석만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시가 산문보다 수준이 높다는 것은 읽는 이 나름대로 의미를 구성하게 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해석의 여지가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시를 읽을 때는 독자가 자유롭게 그 의미에 색깔과 떨림 같은 것을 부여할 수 있지만, 산문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덜 하지요.(43쪽)


 -바로 직관과 통찰에 이르게 하는 언어의 힘이 『도덕경』에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덕경』은 시의 형태로 쓴 것이다. 선생만의 방식으로 시와 산문의 구분을 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굳이 시와 산문의 서열을 나누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만큼 시에는 ‘직관과 통찰’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에 대해서 많이 논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명료한 설명으로 공자와 노자의 차이점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저는 『논어』와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서술 형식에 있다고 봐요.  『논어』에는 늘 ‘자 왈子曰’ 이 등장해요. ‘말씀하셨다’는 포노 센트리즘 Phono-centrism, 즉 음성 중심주의의 발로예요. 니체에 의하면 모든 언어 행위는 폭력이에요. 말을 한다는 행위에는 내 말을 받아들여라 하는 무의식적 폭력성이 내재해 있어요. 반대로 불경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죠.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는 뜻이에요.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보다 상대적으로 화자의 권력이 훨씬 약해져요.
『도덕경』 안에는 ‘노자 왈’이라는 말이 안 나와요. 대신 ‘시이是以’라는 말이 나오죠. 즉 자연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도 이러하자는 식의 표현입니다. 과감한 주어가 등장하여 자신의 말을 설파하는 문장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화자의 권력의지가 매우 약한 상태인 거죠. 화자가 자신의 권력의지를 약화시키니 자연스레 청자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커져요. 그런데 ‘공자 왈’이라고 하면, 청자의 자율성보다는 화자에 복종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거죠.(44쪽)


『논어』와 『도덕경』을 비교할 때 그것 자체만 놓고 보면 『논어』보다 『도덕경』이 격은 높은 거죠.
 간단히 정리하면 『도덕경』은 시적이고, 『논어』는 산문적이에요. (45쪽)



노자는 인간의 내면성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근거로 자신의 사상을 건립합니다. 자연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주관이 개입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노자는 자연을 사유의 원천으로 한다는 점에서 객관성과 투명성과 보편성을 공자보다 비교적 쉽게 확보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이 있죠. 공자가 확보한 투명성 · 객관성 · 보편성은 ‘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내면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주관적인 심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완전히 객관적으로 검증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48쪽)



 배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은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라고 한다. 타인의 삶이 아닌, 주체적인 자기 삶을 살라는 것이다. 깊이 새겨둘 말이다. ‘들어가는 말’에서 고전이 숭배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고 한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이 뭘까요? 자기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죠. 모방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삶을 정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모범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추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의 방식을 취하게 되면 자기 삶에 자기가 없고, 다른 삶이 자기 삶으로 들어와서 내 삶이라고 자꾸 착각하게 만들죠.(107쪽)



그리고 저자는 『도덕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다시 짚어주었다.


『도덕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보면, 우리 가운데 한 명이 되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서 벗어나 고유한 너로 존재하라는 웅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각자 각자가 튼튼한 우리를 만든다고 믿는 것이죠. 고유한 자율성을 지닌 ‘나’들의 연합으로 된 ‘우리’가 더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따라야 할 이념을 미리 정해놓고 그 이념에 따라 개별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일시키려 해서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141쪽)


 궁극적으로는 지식이 아니라 자기를 키워야 합니다. 철학과 사상도 결국은 나의 자존과 나의 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것들이니까요. 이론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이 나를 키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165쪽)


 철학과 사상을 나의 성장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론이 나를 키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마지막으로 저자는 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제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문적 활동은 구체적인 세계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관찰하고 철학적으로 승화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이 자신의 삶이 되고, 또 그것을 문장으로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막연한 이상을 품고 살다가 하나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 정도의 문장은 쓴다고 해서 써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낸 자의 삶이 자연스럽게 글이 되어 드러나는 것이라고,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182쪽)



 -철학이라는 것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문적 활동을 철학적으로 승화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글 속에는 살아낸 자의 삶이 드러나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도덕경』을 읽으며 생각해보았다.



*사족;

 뜬금없는 말 같지만, 저자의 말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도 따끔한 충고가 되는 것 같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결국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잘 산다는 뜻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에 대한 안내판은 책 속의 무수한 글귀들 속에서 만났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묵묵하게 실천하는 일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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