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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Jun 21. 2021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유제프 차프스키 지음/밤의 책

-외로울 땐 독서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저자인 유제프 차프스키는 폴란드 화가이자 작가이다. 그는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 파리와 폴란드를 오가며 새로운 미술 조류를 주창하고 주도한 그는 1939년,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예비역 장교로 참전했다가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차프스키는 소비에트 연방 그랴조베츠 수용소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포로들을 위해 1940년부터 이듬해인 1941년까지 마르셀 프루스트를 주제로 한 강의를 했다. 그때의 강의록이 월간지 『쿨투라』지에 발표되면서 훗날 책으로 출판되었다.


편집자 서문에 의하면 책에 실린 글은 1943년과 1944년 초에, 파손되지 않고 남은 그의 노트 일부를 타자기를 사용해 옮긴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프루스트에 관한 에세이는 1940~1941년 겨울 그랴죠베츠 포로수용소에서, 식당으로 쓰던 수도원의 차가운 방에서 구술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프루스트의 책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39년 9월 이전이었는데, 프루스트의 작품에 대한 기억만으로 강의를 한 것이었다. 대단한 기억력이다.


 그는 1939년 10월부터 1940년 봄까지 스타로벨스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폴란드 장교들에게 프루스트 강의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군사학과 역사학, 문학 강의 등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작은 방이 동료 포로들로 가득 들어찼고, 강사들은 각자 기억하고 있는 것을 동료들에게 최대한 들려주었다고 한다. 포로의 신분이어서 책을 구할 수가 없었으므로 각자의 기억에 의존해서 비밀 강의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그런 강의를 계획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지적知的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10쪽)

 그리고 저자는 포로수용소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영하 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12쪽)


우리는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정신’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었다. 그 큰 옛 수도원의 식당에서 보낸 시간들은 온통 장밋빛이었다. 이 기묘한 ‘교외수업’은, 영영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끼던 우리에게 다시금 세상 사는 기쁨을 안겨주었다.(13쪽)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어떤 존엄성이라든가 개인의 정체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와 그의 동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인간다움, 존엄성 등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문학 강연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졌다. 그런 시간을 통해 그들은 정신적으로 온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 프루스트 작품을 논하기로 했다.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프루스트 작품이라니! 너무 생경한 풍경이지 않은가. 그러나 뜻밖에도 그 속에 진정한 구원이 있었다.


 그들은 포로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동떨어진 다른 세계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서 희망을 읽었고, 그 희망으로 가혹한 현실을 버틸 수 있었다. 그런 행위는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선택했던, 그들의 아주 적극적인 삶의 표현 방식이었다.


저자인 유제프 차프스키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삶을 구원해 주는 인문학의 힘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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