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그리기의 충동은 눈에서보다 손에서 온다. 마치 저격수처럼 오른팔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모든 것은 겨냥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선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닮음이란 생김새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손가락 끝이 만나는 것같이 두 방향에서의 겨냥이 그림에 포착된 것이리라.
부엌 창턱에 놓아둔 구근이 싹을 뻗어내고 있다. 봄이 오면 감자 싹들은 빛을 찾아 마치 송곳인 양 판지를 뚫거나 심지어는 나무도 뚫고 나간다. 창턱에 놓인 구근이 지난해 그녀가 보내 준 그것이라면 아마 작은 수선화 모양의 꽃을 피우리라. 손톱 크기보다 작은 꽃들. 죽어 가는 짐승의 냄새와도 같은 달콤하고도 얼얼한 향을 지닌. 북쪽의 꽃. 순록의 꽃.
데생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데생은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데생하는 동안 우리는 선과 점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지만 완성된 전체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데생이란 언제나 전체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여행이지요···.
클레 그림의 대부분은, 오른쪽 뇌에서 기인하여 연필로 그린 선으로밖에는 형상화할 수 없는 어떤 개념들을 드러내고 있다. 나무와 새 짐승 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두뇌 작업을 거쳐 자연을 발견한다. 개념은 연필심을 통해 종이 위로 흘러나오는데, 그는 그것을 뇌의 여러 방들과 그 회로들에 이르기까지 역으로 추적해 올라가, 바로 그 그물망 안에서 자연의 형태와 리듬에 가장 가깝게 근접해 간다. 이렇듯 그의 그림들은 사유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풀밭에 놓여 있는 그림들은 느낌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그림들을 보았었다. 뚫어질 듯이, 또 비판적으로. ‘말없이’라고 했지만 그때 우리는 종종 공기 중으로 떠다니는 음악 소리를 듣곤 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색들과 명암들이, 또 스방의 그림을 특징짓고 있는 억센 붓 자국들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음악을 지금은 호텔의 작은 방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