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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Jan 11. 2022

풍경들

  -외로울 땐 독서


존 버거의 예술론/ 톰 오버턴 엮음/열화당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미술비평가, 사진 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6년 11월 존 버거의 아흔 번째 생일을 기념해 출간된 이 책 『풍경들』은, 『초상들』과 마찬가지로, 아내인 베벌리 버거(Beverly Berger)가 남편의 원고를 정리해 2009년 대영도서관에 기증한 것이 기초가 되었다.

런던 킹스 대학 연구원이던 톰 오버턴(Tom Overton)이 대영도서관에 소장된 존 버거의 기록들을 2010년에서 2013년까지 읽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초상들』과 『풍경들』, 두 책을 차례로 펴냈다.

 『초상들(Portraits)』은 존 버거의 예술가론을 다루었고, 이 책 『풍경들(Landscapes)』은 그의 예술론을 다룬 것이다.




이 책 『풍경들(Landscapes)』은 예술에 대한 기본 상식이 거의 없는 나 같은 문외한이 읽기에는 많이 힘든 책이었다. 그렇지만 존 버거 특유의 글들이 자주 눈을 사로잡았다. 어떤 대상(object)에 대한, 그만의 적확한 표현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었던 시간이었다. 어디서 인가 불어오는 바람 한 자락에 묻어온 향취를 맡았다고나 할까. 그 향취의 실체를 선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대한 내 느낌을 도저히 잘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저 내가 인상적으로 느꼈던 문장들을 몇 개만 옮기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모든 그림과 조각의 기초는 드로잉이다> 중에서


예술가에게 드로잉은 발견이다. 그저 입에 발린 미사여구가 아니라 정말 글자 그대로다. 예술가로 하여금 눈앞에 있는 물체를 쳐다보고 마음의 눈으로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드로잉이라는 실질적인 행위다. 아니면, 기억에 의지해 드로잉을 한다면, 그 행위는 우리 마음을 바닥까지 훑어서 과거에 쌓아 놓은 관찰 내용을 발견하도록 강제한다. 그 행위의 핵심이 특정한 ‘보기’의 과정에 있다는 말은 드로잉을 가르칠 때마다 나오는 상투적 표현이다. 선 하나, 색조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봤는가를 기록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보도록 이끌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 논리가 얼마나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사물 자체나 사물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서 그 논리에 대한 확인 또는 부인을 발견할 수 있다. 매번의 확인 또는 부인이 우리를 그 사물에 가까이 데려다주고, 마침내 우리는, 말하자면, 그 사물 안에 있게 된다. 우리가 그린 윤곽은 더는 우리가 봤던 것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된 것의 가장자리를 표시한다. 이 말이 아마 필요 이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들릴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종이에 그리는 각각의 흔적이 대상이라는 강을 건널 때까지, 강을 뒤로 두고 떠날 때까지 딛고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53~54쪽)




<혁명적인 삭제:막스 라파엘의 예술의 요구> 중에서


우리는 예술이 우리를 작품에서부터 창조의 과정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예술론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반전은 결국 주어진 대로의 세상에  대해, 자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에 대해 보편적인 의심을 일으킬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예술 덕분에 성숙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확실한 건 무엇인가?(De omnibus rebus dubitandum est! Quid certum?)“(데카르트) 창조적인 정신의 본성은 단단해 보이는 무언가를 해체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변화와 창조의 과정에 있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무수히 많은 사물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그를 통해서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고립된 다른 생명체들 틈에 고립된 생명체가 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가 된다. (85쪽)




<이야기꾼> 중에서


  글쓰기는 절대 연공(年功)을 부여해 주지 않는 외롭고 독립적인 행위다. 다행히 누구나 그 행위를 시작할 수 있다. 정치적 동기든 개인적 동기든, 무언가를 쓰도록 나를 이끈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쓰기 시작하자마자 글쓰기는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투쟁이 된다. 모든 직업의 권능에는 한계가 있지만 동시에 저마다의 영역이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글쓰기에는 저만의 영역이 없다. 글을 쓰는 행위란 대상 경험에 접근하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라건대, 글로 적힌 내용을 읽는 행위가 비슷한 접근행위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경험에 접근한다는 건 집에 접근하는 것과 같지 않다. 경험은 개인적이고 지속적이다. 적어도 하나의 생애에서는, 그리고 아마도 여러 생애에 걸쳐서도. 나는 내 경험이 완전히 내 것이라는 인상을 받은 적이 없는 반면, 경험이 나보다 앞선다는 느낌은 종종 받는다. 어떤 경우에라도 경험은 스스로 펼쳐지고, 희망과 공포라는 관계망을 통해 앞으로 뒤로 스스로를 참고한다(...) 글쓰기의 움직임은 배드민턴 공과 같아서 반복적으로 다가왔다가 물러나고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그러나 글쓰기는 배드민턴 공과는 달리 고정적인 틀에 맞춰지지 않는다. 글쓰기의 움직임이 스스로를 반복할수록 경험과의 거리는, 경험과의 친밀함은 증가한다. 마침내, 운이 좋다면 이 친밀함의 결실로 의미가 맺어진다. (96~97쪽)




<이상적인 비평가, 싸우는 비평가> 중에서



 우리는 어떤 예술작품에 반응하여 이전에 없던 무언가를 우리 의식에 취한 채 그 작품을 떠난다. 그 무언가는 그 사건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억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며, 예술가가 사용하고 조합한 형태와 색깔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기억보다도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의식에 취한 것은,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 보자면, 그 예술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기억이다. 인식할 수 있는 사건( 이때의 사건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나 머리 하나를 의미할 수 있다)의 표상은 예술가의 보는 방식을 우리 자신의 보는 방식과 연결할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가가 사용하는 형태들은 자신의 보는 방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종종 정확한 주제와 정확한 형태적 조합을 잊고서도 어느 작품에 대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39쪽)



     

<하얀 새> 중에서


 모든 예술 언어는 순간적인 것을 영구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개발되었다. 예술은 아름다움이 예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질서의 기초라고 가정한다. (273쪽)


 예술이 자연의 거울이라는 개념은 회의주의의 시대에나 먹힐 개념이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다. 때로는 다른 세계를 제시하기 위해, 때로는 그저 자연이 제공하는 단순한 희망을 확대하고, 확인하고, 사회적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은 창조를 모방한다. 예술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끔 마주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한 조직된 응답이다. 예술은 잠재적인 인식을 부단한 인식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예술은 보다 확실한 대답을 받을 희망에 찬 인간을 선언한다···. 예술의 심원한 얼굴은 언제나 일종의 기도였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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