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 오리 May 14. 2022

회복하는 가족/오에 겐자부로 지음/ 걷는책

-외로울 땐 독서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의 가족 이야기.

작가는 그의 장남인 오에 히카리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이상이 있었고 수술을 받았지만,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지적 장애를 안고 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는 장모가 작가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장애인 아들과 치매인 장모와 한 집에서 살면서도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에는 장애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했다. 아들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의 가족 이야기를 읽어보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에 겐자부로 가족의 모습은 어떤 가족들보다 더 결속력이 있어 보였고,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작가는 장애를 가진 아들을 문제를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정상인과 거의 대등하게 대한 듯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들이 성장을 할 수 있었고, 또 작가 자신이 아들에게 배우는 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재활 세계 회의의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지금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장애를 지닌 내 아들에게서 디선트decent한, 다시 말해 인간적인 관용으로 가득하고 유머러스하며 신뢰하기에 합당한 그런 인격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장애 아동과 공생하면서 가족 모두가 그런 성격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넘어서 괴로워하는 가족과 함께 살고 그 재활을 떠받친 그런 사람들의 디선트한 새로운 인간상. 거기에 일본과 세계를 이어 줄 가장 바람직한 인간 모델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73~74쪽)



지적 장애가 있던 히카리는 어릴 때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아들이 어릴 때 클래식 음악과 다양한 새소리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히카리는 녹음기로 듣던 새의 울음소리를, 밖에서 처음으로 듣고 반응함으로써, 비로소 부모와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히카리는 지적 장애가 있었지만, 부모의 노력 덕분에 내적으로 음악과 소통하면서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유명한 연주자들이 히카리가 작곡한 곡을 연주해서 음반을 냈고, 그 음반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책에서 나오는 여러 에피소드를 보면, 가족들의 따스한 사랑과 이해가 히카리의 오늘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작가는 가족들이 히카리를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히카리 때문에 탄탄한 가족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작가는, 한 집에 사는 치매 환자인 장모가 하루에도 수없이 현관문을 들락거려서 글 쓰는 데 지장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히카리에 적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작가는 아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불평이나 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런 불굴의 삶의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삶이 마냥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시간이 흘러 아내와 나는 노인이 될 것이다. 물론 아내도 나름의 각오를 굳히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과연 장애를 지닌 아들과 그를 지탱해 주는 그 아이의 여동생과 남동생 앞에서 진정 디선트한 인간으로서 행동할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러울 터인 나 자신의 노년을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지, 가슴 덜컥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75쪽)


 우리는 젊은 시절에 히카리와 함께하는 이런 인생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인생에서 아내와 내가 만난 최악의 곤경이란 것이 지금은 극복하여 그것을 추억으로 떠올릴 일도 아니고, 오히려 더 새로이 팽창될 가능성을 가진 채 그 줄기가 이어지고 있고,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 인생에 긴장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주체이기도 하다. (262쪽)


극복하기 힘든 난제 앞에서, 가족들이 어떻게든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술의 힘’이 아니었나 싶었다. 이건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오에 겐자부로 가족을 통해 예술의 힘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보았다.


 히카리는 지적 장애가 있어서 외부와 자유롭게 자기의 생각을 소통할 수 없었지만, 음악을 통해 그는 그의 내면세계를 드러 내보일 수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내부의 고통과 희열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고백한다. 그는 아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듯이, 그 역시 글을 통해서 고통과 희열을 경험했다고 한다. 결국 아들과 그는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의 아내인 오에 유카리는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그림은 이 책의 삽화로 실려 있다. 그녀는 전문 화가는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의 내면세계를 그림을 통해 표출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글을 통해, 그의 아들은 음악을 통해, 그리고 그의 아내는 그림을 통해, 같이 또 다른 삶을 살면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오에 겐자부로가 히카리의 새로운 CD 《오에 히카리 다시》 기념 음악회에서 한 말의 일부를 길게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음악이건 문학이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혼돈스러웠던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모호하고 흐릿하고 꼴을 갖추지 못한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젊은 예술가의 일이 신선한 것은 그 최초의 표현 형태가 낯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만난다고 느낍니다. 히카리 경우로 말하자면, 첫 CD 《오에 히카리의 음악》에는 그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일단 처음 형태를 만들면 그것을 딛고 한 걸음 나아가 그 위에 축적해가는 것, 또는 그것을 새로이 하여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예술을 창작하고 예술가로서 살아감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히카리도 자신이 음악을 심화시켜 《오에 히카리 다시》에 이른 것입니다. 《오에 히카리의 음악》을 스스로 거듭 듣는 것이 자기 교육 역할을 하여 히카리 나름대로 기술이 다양해지고 발상도 풍족해진 것입니다. 그 출발점에는 첫 음악의 형태가 있어야 했습니다. 나아가 그 형태를 새로이 하는 작업을 통하여 그도 자신의 음악을 심화해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CD는 구체적으로 심화되어 있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 자신 풍성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음악의 심화 작업은 히카리에게 마음속 커다란 슬픔의 덩어리에 접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울부짖는 혼의 소리가 가로막힌 벽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히카리의 경우, 그가 체험한 것이나 두 장의 CD에 나타난 것은 단순한 모델이긴 하지만 바로 그 단순한 모델에 예술 일반을 고찰하는 단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 하루하루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CD로 히카리 음악을 듣는 사이에 별 쓸모도 없었던 것 같은 평생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버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느낌은 이런 것입니다. 슬픔이건 고통이건 일단 하나의 형태로 표현했다면 그것을 더욱 탐구하여 앞으로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히카리처럼 지능에 장애가 있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도 음악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음악을 들으며 느낀 바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 자체에 그를 회복시키는 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게다가 표현하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표현된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그러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이것이 예술의 불가사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만든 음악이나 문학에 의해 혼의 어둡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그 불행, 동시에 그 표현 행위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불가사의, 이것을 행복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이것이 겹치고 또 겹치면서 표현자에게 예술의 심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인생의 심화라고 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더욱이 이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쪽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270~273쪽)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