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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Aug 19. 2022

새/오정희 장편소설/문학과지성사

  -외로울 땐 독서



 이 소설은 작가가 불우한 환경에 있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이 동기가 되어 쓴 작품이라고 한다.

 『새』는 2003년 독일 리베라투르 상을 수상했는데, 해외에서 한국인이 최초로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주인공은 초등학교 5학년인 우미와 3학년인 동생 우일이다.

아이들 아버지의 폭력에 못 견딘 엄마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외할머니 집에 맡겼다. 할머니는 밤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고 엄마를 기다렸지만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이들은 외삼촌의 집으로 옮겨 갔다. 외숙모는 ‘아이들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결국 아이들은 다시 큰집으로 갔다.

일수놀이를 하는 큰 어머니는 “아이구, 정신 사나워. 지겨운 박가네 씨알머리들. 제발 숨 좀 쉬자”하며 방문과 마루문을 활활 열어젖히곤 했다.


 아이들이 머물렀던 큰집의 풍경 묘사에서 아이들의 시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겨울은 길고 추웠다. 눈도 내리지 않는 맵고 바람 센 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집 안에 갇혀 있었다. 아이들이 나와 놀던 공터에는 돌개바람에 휘말린 빈 비닐봉지와 휴지 조각들만이 사나운 흙먼지와 함께 피어올랐다.
 큰어머니는 마당의 수도가 얼어 터질까 봐, 수도를 꼭지 부분만 남겨두고 우일이가 입던 노란 잠바로 꼭꼭 싸두었다. 그러고도 미덥지 않아 항상 물을 조금씩 틀어두었다. 사촌들은 우일이의 잠바를 입고 있는 수도를 가리키며 오줌싸개 우일이, 울보 우일이,라고 놀려대었다. 우일이의 잠바를 두르고 언제나 물을 흘리고 있는 수도는 마치 조그만 우일이가 마당 가운데 혼자 서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1쪽)


 아이들은 큰 집 다락에 올라가서 옛날 사진첩을 펼쳐 보곤 했다. 아이들은 사진첩에서 젊은 여자의 얼굴이 나오면 오래 들여다보았다.


 여럿이 찍은 사진이면 콩알보다도 작은 희미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손가락으로 짚었다. 어린 아기를 안고 있거나 만발한 꽃나무 아래 함빡 웃는 표정으로 서 있는 젊은 여자의 얼굴들을 날카로운 칼로 오려내었다. 오려낸 조각을 들여다보노라면 때때로 엷은 막을 찍고 언뜻언뜻 보이던 기억 속의 얼굴이 환히 되살아나다가 사라졌다. (28쪽)


 아이들은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결코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소리 내지 않고 사는 법을 익혔다. 웃을 때도, 울 때도 소리 내지 않았다. 이것은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익힌 자기 방어기제일 것이다. 침묵으로만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었던 아이들의 내면세계는 어떤 색깔이었을까.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 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새어머니도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간 ‘새집’은 낯선 동네에 있었다. 그 집은 세를 주려고 방을 여러 개 만든 집이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눈썹이 까맣고 입술은 빨간, 새엄마를 데리고 왔다. 새엄마는 구두를 다섯 켤레나 갖고 왔다.

새집에는 이웃들이 많았다. 화물 트럭 운전사 이 씨 아저씨는 새를 키우고 있었다. 이 씨 아저씨 옆방에는 과자 공장에 다니는 문 씨 아저씨 부부가 살았고, 안집에는 할머니와 함께 몸을 못 쓰고 누워있는 딸 연숙 아줌마와 남편이 살았다. 그리고 옆방에는 지방으로 다니며 물건을 파는 외판원 정 씨 아저씨가 살았다.  

 자기 집 없이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은 서로 달라 보였지만, 그들 삶의 빛깔은 어쩐지 다 비슷하게 보였다. 그들의 삶은 모두 신산스러워 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아버지는 아이들을 전학시켰다. 우미의 담임 선생님은 우미에게 “눈이 아주 예쁘구나.”라고 했다. 그 말은 우미에게 특별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큰어머니는 우미를 보고 늘 “니 눈깔이 나를 죽일 거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자존감을 지켜줄 어른들이 없는 아이들의 삶은 얼마나 추웠을까. 아이들에게 던져진 어떤 말 한마디는 영향을 크게 주는 것이지만, 어른들은 얼마나 자주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가. 어른들 역시 아이 시절을 통과해왔지만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어른들이었던 것처럼.


 봄이 되자 아버지는 공사장이 있는 일터로 떠났다. 아이들은 새엄마와 함께 살았다.

새엄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77쪽)


 새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본 듯이 말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귀찮아하면서도 한편 아이들이 못 견디게 불쌍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춘향으로 엄마 노릇을 하던 새엄마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렸다. 새엄마가 가버리자 우미가 동생에게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새엄마가 떠나버리자 아버지는 아이들한테 거의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우미는 학교에서 곰순이라는 커다란 인형을 갖고 왔다. 학교에서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번호 순서대로 곰순이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미와 우일이는 곰순이에게 말한다.

 “다른 집에서 좋은 걸 많이 먹어봐서 이런 건 못 먹겠다는 거니? 우린 엄마 아빠도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널 호강시킬 수 없어.”

 아이들은 곰순이에게 자기들이 어른들에게 받았던 구박을 그대로 흉내 냈고, 곰순이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는 터진 배를 다시 꿰매서 학교로 가져갔다.

 놀란 선생님이 우미를 불렀고 문제아동으로 여기고, 상담 어머니를 연결시켜줬다. 상담 어머니는 우미에게 공책을 주면서 마음속의 얘기를 써보라고 했다. 그러나 우미는 매일 똑같은 일과의 내용만 계속 썼다. 우미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우미는 어른들을 믿을 수 없었다.


 우미는 우일이에게 엄마이자 선생님 노릇을 했다. 우일이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 틀리면 손바닥을 때렸다.

 텔레비전이 고장 나자, 우일이는 만화방에 다니기 시작했고 동네 나쁜 형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우일이는 기침을 하면서도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눈썹을 밀었다. 팔뚝에 문신도 했다. 모두 형들이 해주었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우일이가 집을 나갔다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우일이는 형들과 이웃집에 도둑질하러 갔다가 너무 무서워 2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그때 입은 심한 부상으로 우일이는 죽었다. 그런데 우미는 우일이가 계속 살아있는 것처럼 매일 밥상을 차려놓고 학교로 갔다.

우미는 너무 무서워서 동생의 죽음을 인정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미는 계속 환상 속에서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어디에서든 우미를 따라다녔다.


 우미는 이 씨 아저씨의 새장을 들고 집을 정신없이 빠져나왔다. 한참을 가다 보니 새장이 없었다. 우미는 새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새는 아마 자기가 가고 싶은 저 멀리 어디론가 날아갔을 것이다. 우일이의 넋도 그 새를 타고 아주 멀리멀리 날아갔을 것이다.


우일아, 우미야.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철길 둑의 마른풀들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 어둠 속에 낮게  낮게 가라앉으며 흐르는 개천의 물소리에 섞여 그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 이름 짓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 이름 지어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렇게 부르던 마음이 이제사 내게로 와 들리는가 보다. (170~171쪽)



어른들은 도대체 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부모인 그들에게 아이들은 순간적인 쾌락의 부산물이었을 뿐이었나.

아버지의 폭력이 어머니의 가출을 불렀고, 어머니의 가출은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새 여자를 아이들의 어머니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상황의 반복이었을 뿐이고, 아이들은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런 상황이 50~60년대의 전후세대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90년대에 있었던 일이니 더 기가 막혔다. 한 가정의 붕괴는 가정 안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은 버려진 채로 방황하다가, 결국 어둠의 길로 들어서기 쉬울 것이다. 한 가정의 비극이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악순환을 미리 막는 방법은 없을까? 일단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부부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결국 그 피해는 당사자들인 부부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게 된다.

어른들은 최소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다.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문제가 있는 어른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가 나서서 책임을 맡는 수밖에 없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부모 대신 보살피고 감싸는 사회적 시스템이 좀 더 정교하고 촘촘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회적 비용은, 문제가 커졌을 때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아주 경미한 수준밖에 안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요즘에는 이런 상황이 좀 나아졌을까. 안타깝지만 아직은 상황이 그다지 많이 개선된 것 같지 않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해결되기는 어려운 일들이다. 다만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이웃들의 사랑이 더 성숙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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