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픽처(picture)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노트북 화면에도, 핸드폰에도, 잡지와 책, 그리고 신문에도 있으며, 심지어는-오늘날까지-벽에도 걸려 있다. 우리는 말 못지않게 픽처를 통해서도 생각을 하고, 꿈을 꾸며, 우리 주변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그러나 픽처는 이제껏 한 번도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간주된 적이 없다. 회화나 사진, 혹은 영상처럼 픽처의 여러 가지 유형들(types)에 관한 역사는 많지만, 픽처 자체-즉, 3차원의 세계를 캔버스, 종이, 시네마 스크린, 스마트폰과 같은 평평한 표면 위에 표현한 것-에 대한 역사는 없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묘사된 픽처들 사이의 연관성과 상호작용.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쓰여진 모든 글은 어떤 의미에서는 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픽처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현실을 보여주기만 하는 픽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24쪽)
종이 위에 자국을 두세 개 정도 내 보자. 그러면 그들 사이에 관계가 생겨난다. 그 자국들이 다른 무엇인가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선을 두 개 그리면, 그것들은 사람 두 명이나 나무 두 그루로 보일지도 모른다.
첫째 자국이 만들어지고, 그다음에 둘째 자국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사물들을 자국으로 읽는다. 이 모든 것이 자국을 묘사로서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다. (34쪽)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만약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여러 요소들이 거기에 영향을 끼친다. 당신이 전에 그 장소에 가 봤다거나,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장소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78쪽)
자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을 광학적으로 투영한 결과인가? 지난 수 백 년간 사람들은 사진과 동일한 것들을 봐 왔다. 사람을 투영한 것이든, 사물이나 장면을 투영한 것이든 간에,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투영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묘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나는 카라바조가 카메라를 이용해서 일종의 드로잉을 함으로써 픽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물들을 하나씩 차례대로(혹은 인물의 신체 일부를 하나씩 차례대로) 캔버스에 투영해 봤다. 그의 회화들은 여러 투영 이미지를 콜라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72쪽)
도구를 이해한다고 해서 창작의 마법까지 해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창작의 마법은 결코 해명할 수 없다. 위대한 작품에는 반드시 비밀이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무엇으로도 밝힐 수 없는 비밀 말이다. 광학 도구들이 자국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회화를 그려 주지는 않는 것이다. (2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