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
8월 16일 0시 기준 우리나라의 일일 코로나 확진자 수이다. 이 숫자로 또 한 번 많은 것이 바뀌었다. 크게는 2주 동안 서울 경기 지역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었고, 작게는 나의 2학기 수업 계획이 모두 틀어졌다.
8월 21일은 우리 학교의 개학일이다. 그리고 8월 20일은 교육청에서 등교 개학에 관한 새로운 방침을 보내주겠다고 한 날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학부모 및 교사 설문조사를 거쳐 1학기에는 주 1회 등교했던 것을 2학기부터는 3회로 늘려 시행하기로 결정했었다. 그 일정과 방법은 벌써 가정통신문으로 안내가 나간 상황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황이 변했는데 이미 내린 결정이라고 밀고 나갈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아직 공문은 오지 않았지만 내 직감이 말해준다.
2학기에도 아이들 만나기는 틀렸구나.
올해 초에는 이렇게 상황이 심각해질 거라고도, 길어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을 타고 대륙을 넘나드는 ‘그 바이러스’의 이름은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듣고 말해서 여기에 또 쓰고 싶지 않을 만큼 닳고 닳아버렸다. 경제가 흔들렸고, 삶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개 교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일상이 더 이상 일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사에게 일상이란 매일 아침 아이들을 맞이하며,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아이들을 하교시킨 뒤에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칼칼해진 목, 혼이 쏙 빠진 정신 상태로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일상이다. 하지만 2020년 3월 2일, 나는 그 일상을 빼앗겼다. 3월 2일이었던 개학일은 3월 16일, 4월 6일, 연기에 연기가 거듭되어 기어이 온라인 개학을 맞이했다.
휴업이 장기화되면서 불안해하는 학부모들과 소통하고,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자 대다수 학교에서는 대대적인 학부모 전화 상담을 진행했다. 만나본 적도 없는 우리 반 아이들에 대해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화는 짧으면 10분, 길게는 2시간 동안 이어졌다. 2주간의 기나긴 상담 마라톤을 끝낸 뒤,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그 근원을 찾기 위해 난 상담 일지를 기록하며 학부모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많은 아이들의 일상도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교사의 일상이 아이들을 만나 수업을 하는 것이라면, 아이들의 일상은 무엇일까? 수업에 참여하고, 친구들과 놀고, 급식을 먹고, 집에 돌아가 과제를 하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일상 속에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통한 사회적 성장, 필수적인 지식의 습득, 균형 잡힌 영양 섭취,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얻는 안정감과 기본적인 생활 습관 형성 등이 내포되어 있다. 단지 수업이 수업이 아니고, 친구나 선생님과의 놀이나 대화가 재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교사로서의 일상을 빼앗겼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찾아냈다. 온라인 수업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하여 업로드하는 것이었다. 영상 편집에 관한 연수를 듣기도 했고, 마음 맞는 동학년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 연구를 하며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했다. 나는 어른이고, 직업인으로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나의 일상을 나름 만족스럽게 대체했다.
아이들도 그럴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아이 스스로 일상을 적절하게 치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그것은 아이가 아닌 그 보호자에게 달려있다. 예를 들어 우리 반 아이 중 한 명은 하루에 두 세권, 많게는 서너 권의 책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마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수학은 문제집을 풀고 있으며, 화상 영어를 통해 현재의 교육 공백을 채우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학부모의 목소리는 자랑스러움보다는 여전히 부족한데 이것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느낌을 품고 있었다. 한편, 또 다른 학부모는 전화기 너머로 아기 울음소리가 가득했고, 빨리 개학을 했으면 한다는 말 속에 피곤함과 절박함이 묻어났다. 학생이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집이 대다수였고, 아예 전화를 받지 않거나, 아이의 상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학부모도 꽤 있었다.
나쁜 학부모와 좋은 학부모를 가르는 건 옳지 않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 한다. 경제적 여유, 사회적 상황 및 개인적 가치관 등에 의해 각 학부모가 선택하게 되는 '가장 좋은 것'과 '최선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이상적인 학부모 상을 정하고 이를 모든 부모에게 섣불리 적용해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생겨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아이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교사로서 마주하게 되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 전 매일 경제 신문에서 온라인 수업으로 인한 중위권 학생들의 하위권 추락과 학습 격차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저소득층 뿐만 아니라 맞벌이 부부 가정 아이들의 돌봄 결손이 학습 결손으로 이어진다는 부분도 절감했다. 학교에 오지 못하고 외부 생활도 제한되는 이때에, 아이들의 교육적 경험은 오롯이 각 가정에 달려 있다. 방임, 존중, 억압, 자율, 학습결손, 선행학습. 어떤 부모를 가졌느냐에 따라, 혹은 보호자의 여부에 따라 너무나도 다른 경험을 하고, 서로 다른 일상을 갖게 된다.
삶의 많은 것들이 일상을 통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다. 그것이 일상의 무서운 힘이다. 어떤 학생은 지금도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온라인 수업을 들은 뒤 가족들과 정서적 유대를 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일상은 느지막이 일어나 컵라면을 먹고,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하루를 보낸 뒤, 폰을 보다가 새벽 늦게 잠드는 것일지 모른다. 서로 다른 일상의 지속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경험의 차이는 누적되어 더 큰 인격과 지성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적/사회적 대물림의 형태로 고착화될지도 모른다.
기존의 공교육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완벽한 교육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제각각이기에 애초부터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리와 답습, 매너리즘과 폐쇄적 문화. 개선하고 갈아엎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의 교육적 경험을 제공받을 수 있는 중요한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건, 어떤 부모를 가졌건, 학교를 통해 직업 선택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문화를 향유하며 감성을 키우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기 위한 기본적인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공교육의 진짜 역할이다. 본디 쉽지 않았던 그 길이, 빼앗긴 일상으로 인해 더욱 요원해져버렸다.
얼마 전 읽었던 매일 경제 신문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