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책.
가까운 죽음을 겪은 사람들에겐 꼭 필요했던 위로.
예전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삶이 다르다는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잠깐의 순간 동안 죽은 상태였다가 다시 깨어는 것과 같은 일종의 유사 죽음(?)을 겪어 본 사람들도 다들 하나같이 죽음을 알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르다고 한다. 일부는 사망 상태의 시간 동안 겪은 경험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고부터 함께 진행되온 미스터리 아닌 미스터리다. 지난 세월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알길 바랬고, 또 죽음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탐구하고 알아가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과정이 어땠건 죽음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극복하려던 모두가 공통된 결과를 얻었다. 모두 죽었다. 이처럼 아직까지는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고, 아직도 우리는 죽음을 극복해 영생할 수 있게 하는 과학기술이 발전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저자의 말처럼 ‘누구나 죽는다’라는 사실은 어린 꼬마들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꼭 뒤에 이런 전제를 붙인다. ‘나만 빼고’, 혹은 ‘아직 난 멀었지만’. 이렇게 뒤에 붙는 암묵적인 전제로 인해 우리는 죽음의 실체를 가까이서 느끼기 어려울 수 있고, 죽음이라는 것이 사실상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어떤, 나는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어떤 사건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자도 그랬고, 나 역시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지만 아직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게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고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니다’라는 생각이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것을 아주 깊이 생각해본 적 없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 같다.
이 책을 쭉 읽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의 흐름대로 쭉 따라갔다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실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 일어나는 현실적인 상황들, 그리고 그것을 겪는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 등 이 책이 이끄는 대로 나는 편하게 따라갔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죽임이 실제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변화되는 우리의 감정과, 실제 죽음이 진행되고 있을 때 환자와 보호자가 겪는 일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일들까지 아주 현실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이벤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교과서처럼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겪은 사례들을 통해서 죽음의 흐름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언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보호자들이 겪는 어려움들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자질구레 한 것들을 뺀다 해도 보호자들이 겪는 불편과 어려움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당사자(환자)라는 것이다. 당사자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당사자를 위해서는 우리가 의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말 중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많다.
2017년 10월 7일 13시 37분. 우리 아빠도 환갑을 보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병마와 싸우며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영면에 들게 되었다.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빠의 임종이 나와 함께였다는 것이다. 아빠는 내게 기대어 일어서서 소변을 보다가 그 채로 순식간에 임종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힘이 빠진 아빠가 죽었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냥 기운이 없어서 힘이 빠져서 넘어지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아빠를 바로 침대로 눕히고 당황한 엄마에게 빨리 간호사를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그냥 졸도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가 의식이 끊어지고 간호사가 오기까지 30초가 채 되지 않았다. 그날 있었던 일들이 시간 순서대로 깨끗하고 명확하게 (clear 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빠가 임종을 맞던 그 순간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생생하게 느낀다. 그 모습이 절대 잊히지 않을뿐더러 한동안 아빠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간호사가 오기 전에 누워 있던 그 모습과 얼굴의 표정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리고 중환자실부터 병원 전부 안내방송이 나왔다. 코드 블루. 우리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중환자실에서 안내를 받아 퇴장했고, 이후 안내를 받은 의사들이 중환자실로 다급히 들어갔다. 30분이 지났을까. 소생술을 하여도 심박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전에도 잠시 의사가 나와서 현재 계속 심폐소생술을 진행하고 있고, 잠시 심박이 돌아왔다가 이내 다시 멈추었다고 했다. 기계장치에 의지해 호흡이 되고 있는 아빠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때의 얼굴, 그때의 표정, 그때의 색깔이 생상하다. 그리고 13시 37분, 아빠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지금 이 짧은 순간에 그때의 일을 기억하며 글을 적는 것만으로도 나는 눈물이 핑 돌고,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는 아빠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아빠의 껌딱지였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면서 사춘기를 잘못 보내 아빠와 사이가 많이 멀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빠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나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텐데, 아빠가 죽고,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 그때는 아빠가 내 맘을 모르던 게 아니라 내가 아빠의 맘을 몰라줬다. 지금은 그게 참 안타깝고, 아빠에게 미안하다.
아빠가 죽고 난 뒤에 우리 가족은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아빠를 잠시 원망했지만 나는 아빠를 원망할 수 없다.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한 평생을 힘들게 고생만 하다가 갔다. 그런 사람에게 원망이 웬 말인가.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빠는 우리를 지지해주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아빠가 가고 난 뒤에 우리가 휘청이는 정도만큼 아빠의 역할이 실제로 매우 크고 많았다고 느낀다. 그걸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으니 아빠는 얼마나 그동안의 삶이 힘들었을까. 어디다가 하소연을 할 수 있었을까. 외로웠을까? 아빠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보니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고, 그저 많은 생각이 든다.
나의 죽음은 어떨까. 최근 몸이 너무 안 좋았다. 카페를 시작하고 생활패턴이 너무 좋지 않았고, 과로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쌓이는 스트레스를 관리하지 못해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폭식을 했으며, 특히 자기 전에 즐겨 먹었던 야폭식을 안주 삼아 먹던 술은 내 몸을 망가트리는 절정이었다. 그런 시간이 1년이 넘으니 몸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야식과 폭식은 줄였지만, 술은 끝내 끊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죽을 만큼 힘들었고, 결국에는 몸에 이상신호가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했다. 어지러움, 소화불량, 스트레스, 두통, 부정맥, 간간이 보이던 단백뇨 등 수많은 신호가 한꺼번에 나오기 시작했고, 이대로는 죽겠다 싶어 정기 휴무일을 정했다. 이때까지도 별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다. 휴무를 만들어 하루씩 쉬니 좀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렇게 지내면 곧 나아지겠지 싶었다. 그러다 내 상태는 더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회복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휴무를 만든 지 한 달이 되어서 병원을 찾았고,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도 피검사 결과는 양호했다. 그때도 술을 끊지 못하고 이틀 전 마신 술 때문에 간 수치와 황달 수치가 살짝 높았지만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소변검사도 정상이었고, 심전도 역시 문제없이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집안 가족력 중 하나가 심장병과 심장질환, 특히 부정맥이 있기 때문에 심전도 검사를 같이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마냥 좋지는 않았다. 혈압이 매우 높았다. 혈압은 일주일 사이로 두 번을 측정했는데, 첫 번째는 170/100, 그리고 일주일 뒤에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160/90이 나왔다. 고혈압 환자와 맞먹는 수준의 혈압이었고, 혈압이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지속될 경우 속히 약을 먹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다. 집에 오는 길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며칠 못 살고 죽어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지? 엄마는 어쩌지? 카페에 들어간 돈은 어쩌지? 온갖 걱정과 무서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술을 많은 시간 동안 먹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건설적이고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그 이후로 죽음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곤 한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어떨까?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을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까? 억울하지는 않을까? 그중에서 가장 답하기 힘들었던 것은 남은 가족, 특히 엄마에 대한 걱정이다. 내가 죽으면 엄마를 어떻게 하나. 그 고민에 대한 답은 아직도 내지 못했다.
당장 일주일 뒤, 한 달 뒤, 6개월 뒤에 죽는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제일 먼저 상세하고 디테일하게 내가 어떻게 죽고 싶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선택과 짐을 가족들이 떠안지 않게 내가 미리 정해놔야 할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장기는 모두 기증을 하고, 남은 육신은 화장하여, 드넓은 곳이나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곳에 놓이고 싶다. 사실 법이 허락한다면 그냥 뿌려지고 싶다.
남은 죽음까지 남은 시간이 있다면,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동안 솔직하지 못했던 점과, 서로에게 상처가 됐었던 것이 있다면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꼭 말할 것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도 여유가 된다면 그동안 도움을 받았거나,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찾아 만나고 싶다. 물론 상대방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찾는다는 것이 다소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중심의 선택일 뿐이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고려하지 않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상처를 줬던, 아픔을 줬던, 나쁘게 했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만나 그때는 내가 정말 잘못했노라, 미안하노라,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싶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친구들을 만나 마지막 회포를 풀고 싶다. 그동안 곁에 있어줘서 참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인생이 외롭지 않고 희로애락을 만끽할 수 있었다고.
아빠의 죽음과 건강의 악화, 특히 정신적 우울감이 심해지던 일들이 일어난 시기와 이 책을 읽은 시기가 공교롭게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나에게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아직도 나는 ‘지금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공평이다. 누구에게나, 모두에게 죽음은 찾아온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탄생을 맞이한 모든 생명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렇게 탄생과 죽음의 균형이 생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그저 우주를 순리대로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톱니바퀴들 중에서 아주 작은 톱니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도 나에게는 아직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 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부여받은 시간을 잘 쓰는 것 또한 우주의 순리를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안에 담긴 우주의 진리를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해야 하는 역할을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또 최선을 다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우주가 나에게 준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세대의 지혜를 내가 받았으니, 내가 받은 이것들을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함께 길을 걷다 헤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나란히 길을 걷거나 한 사람이 앞서고 나머지가 뒤따르며 걷는다. 갈림길에 이르러서 우리는 한동안 서성거린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몸을 틀고 한쪽 길을 따라 걸어가면 남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배웅한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이 귀를 닫고 입을 다물고 싶어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당신의 직장이나 아이들 얘기도 더 이상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냥 홀로 걸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죽음은 갈림길이다. 산 사람과 죽음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다. 떨어진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바라볼 수도 없고, 서로에게 말하지도, 서로를 듣지도 못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다. 관계를 영영 끊어버리고 기억이라는 작은 조약돌만 남긴다. 우리는 그 조약돌을 보며 그 사람을 그저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고, 추억할 수 있다. 이미 녹화된 비디오처럼 그 사람이 나오는 장면은 매번 똑같은 장면이고 이제는 그저 반복되는 바뀌지 않을 장면들뿐이다. 죽음이라는 것. 정말 갈림길에 들어서서 이제는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고 울부짖으며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고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 한 문장에 인생이 전부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이토록 단순하고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저 사랑하고, 울부짖고, 이해할 수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대기(大氣)가 여기서 한 조각 떼어가고 대지(垈地)가 저기서 한 조각 떼어간다. 기억의 파편 하나가 탄소 원자로 방출되고 물방울 하나가 땅속으로 스며든다. 단백질과 당분, 어렵게 얻은 지혜가 모두 녹아 나와 새롭게 결합한다. 과거의 조직들이 새 생명으로 다시 탄생한다.
우리는 우주 안에서 아주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이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우주가 순리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작은 부품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생명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탄생이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다른 생명이 탄생되는 일이 바로 우주의 순리이다. 이 전에 우리가 받아 값진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 우리가 줄 차례가 된 것뿐이다. 우리가 잠시 빌렸던 것을 이제 다시 다른 생명에게 전달해야 할 시간이 된 것뿐이다. 원래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우리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빌려 쓰다 시간이 되면 돌려줘야 하는 우주의 일부다.
파브르는 이렇게 썼다. “구더기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동물과 인간, 거지와 왕이 모두 똑같다. 거기서 당신은 진정한 평등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평등을 얻는다.” 석가모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더기가 물려와 즙과 흙으로 바꿔놓자, 석가모니는 영롱하게 대지로 스며들었다.
파브르는 어려서부터 내가 좋아하던 위인 중 한 명이다. 사실 어린 시절 진심으로 깊게 좋아했던 위인은 파브르 한 분이다. 파브르는 곤충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자연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곤충에 관심이 많아서 파브르를 많이 좋아했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파브르라는 인물을 잊고 산지 20년이 넘었는데, 이 책에서 파브르가 등장해 신기했고, 사뭇 반가웠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됐을 때 읽었던 파브르 위인전에서 나왔던 내용인데, 파브르가 죽었을 당시에 파브르의 무덤 주변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곤충들이 모여들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대단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곤충을 사랑했으면, 그 사랑을 얼마나 컸으면 곤충들에게도 전달이 되어 파브르의 죽음을 애도하러 말도 안 통하는 수많은 곤충들이 무덤에 모여들었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했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때 이미 파브르는 죽음이라는 것의 순리를 깨달았던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이승을 사는 동안에는 왕이었고, 거지였을지 모르지만 죽음으로 가는 길,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그것은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그들은 오늘날 우리를 위해 본인들이 빌렸던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책의 많은 챕터 중에서도 그래도 나에게 가장 많은 감명을 준 건 ‘애도’였다. 죽음이 일어나고, 그 뒤에 보호자들, 가까운 가족들이 어떤 아픔을 겪는지, 어떤 위로가 필요한 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챕터에서 나에게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았다. 이 부분은 ‘죽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가까이서, 혹은 조금 거리가 있는 죽음을 본 사람이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애통은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 시선을 옮기는 곳마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장소를 옮기는 곳마다 익숙했던 것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오른다. 그러나 애통함과 함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젠 아무것도 없다. 늘 있었던 것이 없다. 텅 비었다. 커다란 구멍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주 애용하는 표현이 있다. 이가 빠진 자리가 휑하다. 항상 있던 것이라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진실이 거짓이 되었다.
애통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억의 띠가 되어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일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이미 본 영화나 드라마처럼 똑같은 장면이 계속 반복된다. 이제는 다음 장면이 무엇이 나올지, 어떤 음악과 대사가 나올지 다 외웠다. 그래도 계속해서 돌려본다. 장면 장면 내가 원하는 부분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돌려본다. 홀로그램처럼, 빔프로젝터로 보이는 것처럼 있어야 할 것은 없고 그냥 잔상과 장면만 남았다. 장면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영상을 켜고 끄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기 맘대로 영상을 켜기도 하고, 내가 원치 않아 끄고 싶어도 못 끄게 한다. 계속 기억하고 반복할 수밖에 없다.
C. S. 루이스는 대단히 짧고 인상적인 회고록에서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별은 부부애의 단절이 아니라 허니문처럼 그저 평범한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아빠가 죽은 뒤에 엄마의 모습을 보면 딱 저 말이 맞다. 엄마는 아빠와 헤어졌지만 부부의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사별은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엄마는 일방적일지라도 아빠와 계속 소통하고, 아빠를 기억하고, 아빠를 걱정하고, 아빠를 생각한다. 엄마와 아빠의 육신의 관계는 끊어졌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관계는 아직도 부부임에 틀림없다. 그전에는 틈만 나면 아빠 생각을 하면서 슬픔을 느끼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생각하며 감정을 우울하고 슬프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아직 부부인데 내가 마치 이혼 한 관계처럼 끊어내라고 한 것만 같았다. 이제는 엄마가 아빠를 기억할 때같이 얘기도 들어주고, 내가 몰랐던 아빠가 어땠는지도 물어보고 그러고 싶다. 며칠 전에도 아빠에 대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일을 엄마가 말해줬는데, 아빠가 무려 5년이란 시간 동안 술을 끊었었다는 얘기였다. 상상도 안된다. 이러한 대화들이 엄마가 아빠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와 함게 조금 더 아빠의 이야기들을 나눠봐야겠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죽음을 결정하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 나온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겪게 될 것들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며,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이 있다. 틈틈이 고민해보고 생각해서 나도 미리미리 결정해둬야겠다. 책에서 기억나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죽음에 대해서 내가 선택해야 할 일들을 가족들에게 떠넘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 죽음만으로도 이미 힘든 상태인데, 나의 죽음을 선택하는 일까지 떠넘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어떤 지역에서는 매년 말 유언장을 작성하는 풍습이 있는데, 나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지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올해 말에는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유언장을 하나 작성하는 것도 해봐야겠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내일 당장 내가 죽는다고 해서 순리에 어긋나는 게 아니듯 죽음은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이다. 그럼에도 죽음은 우리에게 늘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다. 나 역시 아직은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잘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