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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가의 다락방 Mar 19. 2023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1)

지하생활자와 두 개의 세계

  «지하로부터의 수기»(이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문제작’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19세기 인간과 근대문명이 마주한 첨예한 모순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 년째 지하에서 고립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지하생활자의 입을 빌려 “불행한 우리 19세기(p.14)”에 대해 증언한다.


1. 고통과 쾌감

  

  “나는 아픈 인간이다”(p.9)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수기»는 제목 그대로 지하생활자가 겪는 고통을 기록한 수기이다. 지하생활자는 병, 심술, 수치심 등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자신의 고통이 ‘지나친 의식’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한다


“맹세하건대, 여러분, 너무 많이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병 그야말로 진짜 병이다.” (p.14)

하지만 어쨌거나 굳게 확신하는 바, 너무 많은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어떤 것이든 의식이란 다 병이다.”(p.15)



무엇에 대한 ‘의식’이 그를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것일까. 지하생활자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의식’의 정체에 대한 단서는 당시 도스토예스키가 남긴 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기»가 발표된 직후 아내를 잃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의 임종 다음 날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마샤가 침대에 누워있다. 내가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계명처럼 다른 영혼을 제 몸 같이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듯하다. 지상에서는 개성의 법칙이 우리를 묶는다. 바로 ‘나’라는 존재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인간이 이상을 향해 나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즉 사랑으로 타자를 위해 자신(구체적으로는 마샤와 나 말이다)을 희생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며, 이런 상태를 라고 부를 수 있다.”

Ф. М. Достоевский,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нение в тридцати томах (Л.: Наука, 1972-1990), т. 20, c. 172,  조유선, < 고통과 상상력 그리고 글쓰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중심으로 > , 슬라브학보 제27권 3호, 2012, p.254에서 재인용.



  이 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개성의 법칙”과 “‘나’라는 존재”가 “고통”과 “죄”를 낳는다고 말했다.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식, 즉 자의식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기»에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이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점잖은 사람이 가장 큰 만족감을 맛보며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p.13)이라고 선포한 그는 자의식이 비대해지는 가운데 고통이 쾌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강렬하게 의식하고 그걸 빌미로 남몰래 속으로 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그러다 보면 쓰라림이 마침내는 어떤 치욕적이고 저주스러운 감미로움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단연코 진지한 쾌감으로 바뀌는 것이었다!……이 경우 쾌감은 바로, 자신의 굴욕을 너무도 선명하게 의식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었다……더 이상 출구도 없고 절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중략)···설령 원한다고 한들 사실상 마땅히 변할 대상이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쾌감이 생기는 것이다.” (pp.16-17)



  이렇듯 지하생활자는 자기 자신이 타인으로 변모할 수 없다는 사실, 즉 스스로의 고유성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감을 느끼는 존재이다. 이에 그는 갈수록 더 화려한 언변으로 자의식을 옹호하는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가령 그는 거칠고 짜증 나는 변덕과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욕망”(p.44)은 지켜져야 하며, 그러한 욕망의 실현이 “인간의 삶 전체의 발현”(p.47)을 위한 유일한 방안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지하생활자가 보기에 고통과 쾌락은 마치 덩굴처럼 한데 뒤엉켜있으며, 그 근저에는 ‘자의식’이라는 토양이 있다.  

필자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처음 읽었을 때 그린 그림


2. “2x2=4”와 “자연의 법칙”


  지하생활자는 앞서 언급한 고통의 쾌락으로의 전화(轉化)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유형을 자신의 대척점에 두었다. 자신이 “강렬하게 의식하는 인간”이라면 이들은 “튼튼한 신경”을 가진 “즉흥적 인간”이며, 19세기의 지식인에게 부여된 “의식 분량의 절반, 아니 4분의 1만”(p.14)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으로 인해 관조하는 것 외에는 “뭐 하나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었”(p.32)던 지하생활자와 달리, 이들은 “부차적인 원인을 근본적인 것으로”(p.31) 받아들이며, 매우 빠르게 확신에 도달하는 “활동가”들이다. 한편 지하생활자는 “활동가”들이 목표를 향해 마치 성난 황소처럼 돌진하다가도 “자연의 법칙”이라는 이름의 벽을 마주하면 너무도 쉽게 항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수기»에서 “활동가”들이 따르는 “자연의 법칙”은 “2x2=4”라는 수학 공식으로 함축되어 표현된다. 이는 ‘1) 인간의 이익은 안락, 부유함, 자유, 평온 등으로 단순화되고 수치화될 수 있다, 2) “인간 이익의 총 장부”(p.37)가 만들어져 모두가 이를 따르는 순간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개인의 욕망도 증발하듯 사라질 것이다’라고 본 “활동가”들의 믿음을 비꼬기 위한 표현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하생활자가 말하는 “활동가”는 일말의 의심과 회의도 없이 이성과 합리성의 원칙을 맹신하는 19세기의 계몽주의자,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들이 인간의 자의식에서 발산되는 욕망과 이를 뒤따르는 쾌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히 비판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페이지 표기는 “지하로부터의 수기”(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민음사, 2010)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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