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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자의 구원

살아남은 자의 도덕과 <그리스인 조르바>

by 올가의 다락방

드디어 <그리스인 조르바>를 완독 했다. 인덱스를 붙인 모든 페이지에 메모를 덧붙였다. 메모는 주로 화자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차마 옮길 수 없는 말들은 독서노트에 수기로 적었다.


나는 평생의 지기를 전쟁터인 카프카스로 보내놓고, ‘책벌레’라는 단어 하나를 이기지 못해 ‘진짜 삶’이라는 이름의 연극 무대를 만든 화자를 견딜 수가 없었다. 코뮌을 만들어 볼 작정으로 광산을 매입해서, 결국은 자본가 노릇을 하며 글이나 끄적이는 꼴이라니.


조르바는 화자의 연극 무대를 지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대들보 역할을 맡았다. 화자는 조르바를 받들어 모시는 것으로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고 하는 한편, 조르바를 철저히 대상화하며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지켜나갔다. 화자가 스스로를 물질을 통해 정신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지칭한 대목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참고로 조르바는 인간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는데, 첫 번째 부류는 먹는 것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어내고, 두 번째 부류는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내고, 세 번째 부류는 정신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며, 자신은 두 번째에 속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물론 화자가 조르바를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을 조르바의 우위에 두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버리지 못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2025, 열린책들, p.167

눈치챘겠지만 화자에 대한 나의 분노에는 자기혐오가 실려있다. 혁명의 기로에 놓인 것도 아니고, 먹물도 아니고, 광산을 연극 무대로 사들일 돈도 없는 내가 왜 스스로를 화자와 동일시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본디 소설에는 그런 마법과도 같은 힘이 있는 법이다.


하여튼, 이렇게 내내 팔짱을 낀 자세로 눈에 핏발이 설 때까지 화자를 노려보던 나는 다짐했다. 그가 떠밀어주는 감동과 환희의 서사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결코 그와 동화되지 않으리라. 나는 화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동시에, 그와 나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25, p.414.

그런데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뒤, 화자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의 그러한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조르바! 이리 와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라는 그 한 마디가 나를 무너뜨렸다. 그 대목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화자의 생에의 의지가 그의 기만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크다는 것을. 낯선 몸의 언어를 배워가면서까지 살아남고자 하는 한 인간 앞에서 나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는 왜 그렇게 까지 해서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일까? 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친구도, 조르바도 모두 펜대를 잡은 손 끝에 몰린 피로 그의 가슴속에 맺혀 있었다. 그런 자에게 어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25, p.441.

화자가 살아남은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로 살아남다 보니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인지, 기록을 남길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건 화자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조르바와 화자 덕분에 나는 삶을 긍정한다는 게 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오늘 내 영혼의 키는 분명 조금 자랐을 것이다.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 책세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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