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철학 입문자의 공부 기록
『니체와 철학』과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를 함께 읽으며 읽기 노트를 정리했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문장이나 중요한 문장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제가 볼 용도로 쓴 글이라 많이 거칠지만,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참고할 만한 기록이 되었으면 합니다.
※페이지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박찬국, 세창미디어, 2020)를 기준으로 표기했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사진은 따로 찍어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왕이면 책을 직접 구해서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가치전환이란 힘에의 의지에서 긍정이 승리하는 것인데, 이때 부정은 일소되는 것이 아니라 잔존한다. 그런데 이는 삶을 억압하는 힘으로 잔존하는 게 아니라 창조와 생성을 위해 필수적인 비판의 힘으로 잔존한다. 가치전환이 일어날 때 부정은 다수성과 생성과 창조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부정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가치전환은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내적 체험을 통한 주권성의 회복을 떠올리게 한다. 바타유는 긍정(춤, 경쾌함)과 부정(노동, 무거움)을 대립시킨 니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사를 이성과 노동의 세계와 에로티즘의 세계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문명을 건설했지만 그 과정에서 종속적이고 노예적인 도구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에로티즘의 세계에서의 위반의 경험이다. 즉,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두려운 존재를 향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글 궁금해하며 한계까지 가보는” 내적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 김겸섭, ‘바타이유의 에로티즘과 위반의 시학’)
니체가 말하는 가치전환도, 바타유가 말하는 주권성의 회복도 ‘부정’과 ‘이성과 노동의 세계’의 일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수성과 생성, 쾌락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성과 노동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와 바타유는 인간의 삶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분투했던 철학자인 것이다.
가치전환이 이뤄지면 영원, 존재, 일자, 필연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생성, 다수성, 우연 속에 존재하게 된다. 양자를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니힐리즘의 관점이다. 우연과 필연의 대립이 해소되면 우연의 필연성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영원회귀의 유희이다.
이때 영원회귀는 단순히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것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니체는 생성을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로 파악했는데, 여기서 ‘동일한 것’은 ‘다양한 것’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힐리즘의 범주에서 ‘동일한 것’, 일자는 ‘다양한 것’, 다수성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기원으로 여겨져 왔다. 니체는 이러한 이분법 자체가 해소될 때 가치전환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로 이어지는 전통철학에서는 선과 진리 같은 절대적인 ‘가치 그 자체’가 있다고 본다. 반면 니체는 그런 고정된 가치는 없으며, 가치를 만드는 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토대로 절대적 가치를 발굴해내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누가 어떻게 가치를 평가하느냐에 주목했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가치평가는 어떤 절대적 기준을 토대로 가치를 줄 세우는 게 아니라 높은 것과 낮은 것, 고상한 것과 저열한 것을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힘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차이를 기반으로 한다. 즉, 중요한 것은 그것이 ‘능동적인 힘에서 왔는가, 반동적인 힘에서 왔는가’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높은 것과 낮은 것, 고상한 것과 저열한 것의 구분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절대적 ‘선’을 상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니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가치의 영원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가 하고자 한 것은 특정 가치가 어떤 힘에서 나왔는지, 그 힘이 삶을 강화시키는지, 약화시키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가치들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들의 기원”을 평가하는 것, 그게 니체가 말하는 계보학적 진단이다.
『금붕어의 철학』에 따르면, 구조주의는 인간을 ‘구성하는 주체’에서 구조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로 전도시켰다는 점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구성하는 주체’는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에 의해 완성되었다. 칸트는 주체의 마음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구성되는 주체’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는 바로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이다. 이성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그 한계를 파악한 칸트 덕분에 이들은 역설적으로 그 한계 바깥에 있는 타자를 발견해냈다. 그 타자가 니체에게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었으며,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이었고, 마르크스에게는 경제적 관계였다. 이들은 일견 세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가 실은 통제될 수 없는 타자(심연)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로 가는 문을 열었다.
물론 공리주의는 고통의 축소와 쾌락의 증진의 관점에서 가치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숭상하는 전통철학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효용이 있다고 판단되는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전통철학의 ‘절대화’가 가진 한계로 수렴된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보편타당하게 지켜져야 할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와 거리를 지운다. 쾌락을 증진시키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법칙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공리주의 또한 마찬가지의 효과를 낸다. 니체는 이제 맞서 인간들 사이의 위계(거리), 다름(다수성), 고유함(창조성)을 긍정하고 그것을 삶을 강화하는 힘으로 삼으려고 했다.
헤겔은 노예가 인정투쟁을 통해 자기 본질을 회복한다고 보았고, 포이어바흐는 지혜, 사랑, 정의 등의 능력이 신에게 투사된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다시 인간 자신에게로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양자는 모두 인간의 능력을 절대정신이나 신과 같은 타자에게 빼앗겼다가 되돌려받는 구조를 전제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회수의 과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주인이나 신과 같은 타자에게 인정받은 능력을 회수하는 것은 인간이 여전히 반동적인 가치 체계와 타자의 인정에 매여 있는 노예적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는 자신을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형이상학과 기독교로부터 분리하고자 했으나, 본질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주인과 신의 질서 내에서 이뤄지는 회수를 해방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애서 들뢰즈는 포이어바흐의 철학이 헤겔 철학의 보수반동적 성격을 이어받았다고 평가한다.
변증법은 대립, 모순, 지양의 구조로 세계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때 부정은 사물 속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힘(능동적 힘/반동적 힘)의 질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외관상의 운동, 즉 모순이 충돌하고 종합되는 형식적 과정만을 본다.
이와 달리 니체는 가치 그 자체가 아니라 가치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진단해야 한다고 봤다. 들뢰즈도 같은 맥락에서 변증법은 힘들의 관계를 분별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변증법은 추상적인 차원으로 "전도된 이미지"만을 다룬다. 허구적 운동만을 포착할 뿐 차이를 생성하는 진짜 힘은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의지’는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쇼펜하우어에게 빌려온 개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모든 개별 현상 너머에서 흐르는 근원적인 생명력이자 충동으로 보았다. 니체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특히 음악은 이 세계의지를 경험하게 해준다. 가령 우리는 슬픈 노래를 들을 때 “내 슬픔”만 경험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슬픔 자체”를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 개별적 자아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충동과 합일되게 만든다고 보았다.
저자는 비극을 “디오니소스에 의해 지배되는 놀랍고도 불안정한 동맹”이라 불렀다. 비극의 표면에는 아폴론적인 서사적 줄거리가 드러나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가 본질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이다. 아폴론적 예술은 형상, 질서, 조화의 범주를 통해 개별적인 현상을 표현한다. 그러나 개별적 자아나 현상세계에 주목하는, 즉 아폴론적 평가 기준으로 비극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
니체는 현상세계의 붕괴와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세계의지(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절대적 진리와는 구별되는 근원적 생명력)의 긍정을 비극의 본질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형상의 아름다움이나 조화가 아니라, 개별성의 소멸과 의지의 영원한 생명력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비극은 오직 디오니소스적인 체험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다만 『비극의 탄생』의 니체는 여전히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 아래, 개인과 다수성이 우주적인 통일 의지 속에 해소될 때 삶이 긍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들뢰즈는 니체가 말년에 이르러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았다. 첫째, 디오니소스의 삶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진정한 길이라는 깨달음. 둘째, 진정한 대립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사이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 놓여 있다는 깨달음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퇴폐의 천재”라 불렀다. 이는 다소 낯선 표현일 수 있다. 통상적으로 ”퇴폐“는 방탕과 무절제를 뜻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관념과 지식으로 삶을 재단함으로써 인간 본능이 가진 힘을 약화시키고 이성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적 의미의 “퇴폐”가 삶의 본능적인 힘이 위축, 쇠퇴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니힐리즘의 관점에서 본 퇴폐는 본능의 과잉과 무절제이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본 퇴폐는 절제의 과잉인 것이다. 니체는 이렇듯 전통철학과 기독교에 의해 고정된 언어를 전복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디오니소스의 탄생과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전해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우스와 사랑에 빠진 세멜레가 헤라의 속임수로 인해 불타 죽는다는 설화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시신에서 아기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꿰매 넣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번 태어난 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다. 어린 디오니소스는 티탄족에게 잡혀 산산이 찢겨 죽는다. 그의 심장만을 간신히 구해낸 제우스는 이 심장을 세멜레의 몸에 다시 심어 디오니소스를 부활시킨다. 이로써 디오니소스는 “영원히 다시 태어나고, 파괴로부터 다시 돌아오는” 파괴와 부활의 신으로 자리매김한다.
니체는 바로 이 두 번째 전승, 디오니소스의 찢김과 부활, 파괴와 재생에 주목했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삶의 영원한 회귀 개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양과 질’ 파트 잘 이해가 안 가서 내 방식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1) 힘은 양적 차이도 가지고 있으며, 질적 차이도 가지고 있는데, 전통철학과 과학의 영역에서는 전자만 다뤄져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힘들의 질적 차이(반동적인 힘/능동적인 힘)이다.
2) 그렇다고 해서 양적 차이가 중요치 않다거나, 양적 차이와 질적 차이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3) 힘들 간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양적 차이는 그 자체로 질적 차이를 보여줄 순 없다. 하지만 힘의 강함/약함, 크기/세기에서 힘의 질적인 차이가 결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4. 가령, 물의 온도차는 양적인 차이지만, 물이 100도가 넘는 순간 우리는 물이 기화하는 질적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두 힘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관계에서 양적 차이가 커질 수록 한쪽은 능동적이고 공세적으로 작용하는 한편, 다른 한 쪽은 방어적, 수세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힘은 언제나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양적 차이가 질적 차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4) 그렇기에 우리는 힘들의 양적 차이에만 주목하는 대신, 그 양적 차이가 어떻게 질적 차이를 만들어나가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의 ‘과학과 영원회귀’ 파트가 잘 이해가 안 가서 들뢰즈의 원문을 읽으며 내 방식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1) 니체는 영원회귀를 단순히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고 보지 않는다. 니체에게 생성이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인데, 여기서 ‘동일한 것’(일자)은 ‘다양한 것’(다수성)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니힐리즘의 범주에서는 일자가 다수성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기원으로 여겨져 왔다. 신을 일종의 이데아로 설정하는 종교적 사유를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2) 그런데 니체는 과학이 그러한 도덕과 종교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이를 대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과학의 입장이다. 먼저 뉴턴의 ‘기계론’적 사유는 영원회귀 자체는 긍정한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말하는 ‘절대적 차이’, ‘다양성’ 자체의 재생산이 아니다. 뉴턴의 역학은 에너지와 물질의 총량이 변하지 않으며, 모든 운동은 고정된 물리 법칙 안에서 순환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에 입각하면, 모든 입자들의 배치는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즉, 기계론적 사유에서 말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3) 반면, 열역학은 세계를 에너지의 변환 과정으로 본다. 에너지는 보존되지만(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항상 다른 형태를 취하는데, 그 과정에서 유용하게 일할 수 있는 형태로는 점점 소모되는(제2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비가역적 변화를 겪는다. 때문에 열역학적 사유 하에서는 ‘회귀’의 가능성 자체가 부정된다.
4) 즉, 니체의 입장에서 기계론적 사유는 차이의 생성을 부정하고, 열역학적 사유는 일자와 다수성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회귀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두 한계를 갖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고정된 법칙 속에서 반복되는 순환도 아니고, 비가역적인 소모도 아니다. 영원회귀는 그 자체로 “차이 나게 하는 ‘하나’”(p.93), 즉 차이 자체가 다시 돌아오는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영원회귀가 “동일성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 밖에서 새로운 원칙을 요구하는 절대적인 차이에 대한 사고”(p.92)라고 보았다.
5) 여기서 “절대적인 차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니체는 분명 ‘질적 차이’가 ‘양적 차이’에 상응해서 생긴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힘이란 늘 다른 힘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정의된다고 보았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양적 차이’를 가능케 하는, 존재론적인 차원의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물의 온도 차가 양적 차이라면, 질적 차이는 100도 이상의 물이 기화하면서 만들어지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차이는 ‘기화’라는 현상 자체를 만들어내는 생성 원리이다. 즉, 절대적 차이는 두 사물 간의 비교 가능한 차이가 아니라, 두 사물의 생성과 결부된 근원적인 차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함”으로 머무는 대신, “다양성 자체의 재생산”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영원회귀’가 하나의 우주론인 동시에 윤리적 사유라고 말한다. 이때 윤리적 사유는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첫 번째 선택은 행위의 기준에 대한 선택이다. 즉, 무언가를 실천할 때, 종교나 도덕, 과학이 정해놓은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대신, ‘내가 하는 행위가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할 때, 과연 나는 이를 긍정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게으름, 탐욕, 비겁함, 악덕”(p.94)처럼 일견 부정적이어 보이는 행위도 ‘의욕’되는 순간 능동성을 부여받으며 긍정의 힘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첫 번째 선택을 거치면 의욕될 수 있는 것은 남고, 의욕될 수 없는 것은 도태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동적인 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동적인 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동적인 힘이 “허무주의적 의지 속에서 강력한 동력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無)에 대한 의욕도 하나의 ‘의지’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무에 대한 의지는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의욕하는 ‘첫 번째 선택’에 저항한다.
이때 오는 것이 ‘두 번째 선택’이다. 두 번째 선택은 반동적 힘이 자기 한계에 도달할 때, 모든 것이 “아무런 목적 없이 생성한다는 것”(p.95)을 긍정함으로써 적극적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때 “어떤 고정된 영원불변의 목적이나 가치에 의존하여 생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려는 모든 반동적인 힘들”이 사라진다. 즉, 허무주의를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생성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긍정할 때 비로소 절대적인 긍정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 선택은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전제로 삶을 긍정하려는 결심인데, 이는 반동적인 힘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선택은 그러한 반동적인 힘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내릴 수 있는 것으로, 삶의 무의미함까지 긍정하려는 결단(=삶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긍정될 수 있다)이다. 첫 번째 선택은 병든 차라투스트라에 대응되며, 두 번째 선택은 치유된 차라투스트라에 대응된다. 아래의 문장이 영원회귀의 윤리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영원회귀는 부정적인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원심력이 부여되어 있는 바퀴이다. ‘존재’는 생성으로부터 긍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긍정에 반대하는 모든 것과 니힐리즘과 반동의 모든 형태를 자신으로부터 쫓아내 버린다…‘영원회귀’는 ‘반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하는 ‘반복’이며 구제하는 ‘반복’인 것이다. 해방하고 선택하는 경이로운 ‘반복’인 것이다.” (p.100)
들뢰즈는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를 투쟁, 전쟁, 경쟁과 결부시키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니체의 관점에서, 기존의 가치체계 하에서 인정 받고 명예를 얻으려는 행위는 노예의 태도이다. 사람들 사이의 투쟁과 경쟁은 기존의 가치체계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동할 뿐이다.
니체는 “투쟁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들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들은 투쟁에 의해서 힘들과 의지들 간의 진정한 위계질서를 전복한다.”라고 보았다. 여기서 “진정한 위계질서”는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 간의 위계질서이다. 전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지만, 후자는 자기 보존을 위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억압적인 힘이다.
그런데 노예들은 투쟁을 통해 그 위계를 뒤집는다. 즉,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힘을 악한 것으로, 비굴하고 억압적인 힘을 선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창조적인 생명력보다 죄책감, 복종, 자기부정, 금욕 같은 가치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이유이다. 니체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투쟁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들뢰즈는 니체에 대한 오독을 막기 위해 이 점을 강조했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의 4장 2절 ‘새로운 질문의 형식’을 내 언어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니체는 어떤 현상의 본질을 물을 때 그것의 영원불변하는 성격을 보려는 대신, 그것이 삶을 약화시키는 힘(반동적인 힘)인지, 강화시키는 힘(능동적인 힘)인지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본질은 의미와 가치인데, 이는 각각 “사물의 이면에 있는 힘”과 “힘에의 의지”에 해당한다.
2) 홉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힘은 흔히 표상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홉스는 힘을 생존을 위한 수단이자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으로 보았고, 헤겔은 힘을 주인-노예의 변증법 속에서 타자로부터 인정받는 힘으로 보았다. 즉, 이들은 힘을 측정 가능하고, 소유 가능한 것으로 해석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투쟁으로 인해 돈과 명예 등을 매개로 인정을 받으려는 기존의 가치 체계는 더 공고해졌다.
3) 니체는 이러한 인정에 목매는 자들을 ‘병자’ 혹은 ‘노예’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노예들 간의 투쟁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없다. 이는 창조하고 긍정하는 능동적인 힘을 ‘악’으로 만들고, 억압하고 순응하는 반동적인 힘을 ‘선’으로 만듦으로써 힘들과 의지들 간의 진정한 위계질서를 전복할 뿐이다.
4) 니체에게 힘은 권력이나 명예와 같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힘은 스스로 증여하고 창조하는 생성의 운동이다. 힘은 표상될 수 있는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운동성 그 자체이다.
5) 반면 힘을 표상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힘을 추구하는 의지에서 어떤 모순을 보게 된다. 가령 어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할 때, 그의 힘은 그가 새로운 작업을 하는 과정 속에서만 살아 있다. 그런데 그가 작업을 매개로 돈과 명예라는, 측정 가능한 결과(표상)를 목표로 삼는 순간 창조적인 힘은 사라지게 된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창조적 힘이 맞서게 되는 것이다.
6)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홉스와 헤겔은 힘에의 의지에 한계를 설정했다. 홉스는 힘을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으로, 헤겔은 힘을 노예의 인정으로 만들었다.
7) 쇼펜하우어는 아예 의지를 사물들과 세계의 본질로 만들었다. 이렇게 의지가 본질이 되면 칸트가 완성한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 사이의 경계는 사라졌다. 하지만 내적인 의지와 이것의 표상인 외부 세계 간의 구별, 즉 본질과 가상의 구별이 재생산되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 자체를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8) 하지만 니체는 힘 자체를 표상되거나 측정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의지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었다. 의지는 이미 정립되어 있는 가치에 맞서서 새로운 것을 의욕하는, 창조적인 움직임이 된 것이다. 이렇듯 니체는 힘과 의지에 대한 정의를 전복함으로써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냈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에서 개괄하고 있는 철학사와 이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1) 니체는 근대 이후 인간이 신을 살해하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생을 부정하는 니힐리즘은 계속된다고 보았다. 신적인 가치(종교)의 자리에 인간적인 가치(도덕, 공리, 진보)가 올라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을 부정했으나 여전히 그에 상응하는 경건한 가치들을 믿는 사람들을 ‘보다 높은 인간들’이라고 부른다.
2) 니체는 이러한 현상의 책임이 칸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에 의해 약속된 세계로 간주되었던 참된 세계”가 칸트철학을 통해 “생각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는” 물자체의 세계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철학 하에서 “신, 자유, 영혼의 존재”는 비록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도덕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소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3) 가령 저자는 이러한 칸트철학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도덕적인 당위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요청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칸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계는 자연과학의 법칙, 즉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인과법칙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인과법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도덕을 지킬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도덕적인 당위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인과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때 자유는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지성적 세계에 속하는 초월적 자유이다.
4) 칸트가 말하는 현상계와 예지계의 이분법과 도덕적인 당위명령은 기독교의 이분법적 세계관 및 계율을 닮았다. 따라서 니체는 종교가 칸트와 같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을 매개로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보았다.
5) 이는 소크라테스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철학 전통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자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입법가의 역할을 유기하고 기존의 가체를 지키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진리와 이성의 요구에 따른다고 말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다지 이성적이지 않은 힘들은 국가와 종교가 강요하는 가치”가 자리잡고 있다.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은 인간이 국가와 종교에 복종해야만 하는 근거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작업 이상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6)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철학이 복종적 가치를 따르지 않았으며, 철학에서 삶과 사유를 분리시키지 않았다고 본다. 그런데 철학이 퇴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는 철학이 탄생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성의 언어를 차용했는데,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철학 그 자체보다도 종교라는 가면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본다.
7)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은 그렇게 가치가 전도된 채로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는 퇴화의 역사이며, 이것이 서양의 역사 전체를 규정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원리에 깊숙이 배태된 문제이다. 그래서 니체는 미래의 철학이 이 모든 퇴락의 전통을 끊어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반역사적, 반시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들뢰즈는 이 지점을 강조했다.
1) 니체는 종교와 전통 철학에 의해서 힘들의 질적인 위계(고귀함과 저열함)가 힘들 사이의 도덕적 대립(선과 악)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원한’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2) 원한은 능동적인 인간을 악한 자로, 반동적인 인간을 선한 자로 만드는 상상 속의 복수이다. 이는 힘들이 가지고 있는 질적인 성격을 무력화하며 그를 추상화한다.
3) 들뢰즈는 원한에 의해 힘이 능동성과 반동성이라는 성격을 박탈 당하는 계기들을 다음과 같이 세분화했다.
① 인과성의 계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독수리와 새끼 양의 추론법을 가지고 와야 한다. 새끼 양은 “맹금은 악하다. 그러나 나는 맹금의 반대이다. 따라서 나는 선하다.”라는 논리로 상상 속의 복수를 펼친다. 사실 사냥을 하는 것은 독수리의 본성에 속하는 일이지만, 원한은 독수리로부터 사냥이라는 본성을 떼어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힘(본성)은 원인으로, 그것의 표현(사냥)은 결과로 간주되며 분리되는 것이다. 이때 능동적인 힘(독수리)은 ‘원인’에 해당하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 것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된다. 반동적인 힘(새끼 양)은 이렇듯 독수리라는 타자를 악으로 간주함으로써 스스로를 선으로 규정한다.
② 실체의 계기: ‘원한’은 독수리를 사냥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로 만듦으로써 맹금이 발톱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럼에도 감히 발톱을 세운 독수리는 ‘악’을 선택한 자, 자신의 본능을 다스리지 못한 자로 비난받는다.
③ 상호결정의 계기: 위의 과정을 거쳐서 힘은 능동성과 반동성, 고결함과 저열함이라는 위계에서 분리된 채로 중화된다. 중화된 힘은 선과 악이라는 노예 도덕의 기준으로 분류된다. 본능을 펼친 독수리는 그것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악’이 되고, 애초에 사냥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새끼 양은 가지고 있지도 않은 힘을 발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이 된다.
4) 물론 여기서 독수리와 새끼 양의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이렇듯 반동적인 힘은 능동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노예와 약자(반동적인 인간)의 복수가 성공한다고 해도 이들은 여전히 노예와 약자로 남는다.
1) 반동적인 힘은 능동적인 인간을 악한 자로, 반동적인 인간을 선한 자로 만드는 상상 속의 복수를 통해 힘들 간의 진정한 위계를 뒤집는데, 니체는 그러한 전복의 동력이 ‘원한’에 있다고 보았다. 반동적인 힘은 능동적인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리시킨다. 이렇게 능동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면 그것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힘이 되어 내면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고 긍지를 품지 않으며 오히려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심의 가책이 낳는 고통은 반동적인 힘에 의해 무력화된 능동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2)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양심의 가책이라는 이름의 고통이 죄의 결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죄를 지었기에 고통 받는 것이라 여기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과정을 관장하는 자가 바로 성직자다. 니체는 능동적이고 강한 자들을 악한 자로 간주하게 만드는 ‘원한’이 유대의 성직자에 의해 창출되었다면, 그러한 ‘원한’의 방향을 타인에서 우리 자신으로 전환하게 만든 게 바로 기독교 성직자라고 본다. 물론 최초의 기독교 성직자는 바로 바울이다. 니체는 바울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해 기독교를 만든 주범으로 바라보았다.
3) 니체가 비판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죄와 원한의 상징으로 만든 바울이다. 니체는 예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이에 ‘십자가에 못 박힌 디오니소스’라는 표현을 쓰며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를 종합하려 시도했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밝힌 예수의 진정한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는 완전한 행복이 내세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동등한 존재라고 믿었고, 이에 모든 사람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것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발견할 것을 강조했다. 둘째, 예수는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상징’을 활용했다. 그는 마음 속 평화와 행복, 사랑 같은 내적 실재만을 ‘진리’로 간주했으며, 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모두 비유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했다. 즉, ‘천국’이라는 것은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시간적, 공간적 차원의 실재가 아니라, 마음의 한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즉, 그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식이기에,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 분노할 필요도, 저항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현세에서 하나의 모범이 되고자 한 예수를 내세로, 피안으로 옮겨 버린 자가 바로 바울이다. 그는 이를 위해 영혼불멸이나 최후의 심판 같은 개념을 고안해 냈다. 이렇게 삶의 무게중심을 신이 관장하는 내세로 옮긴 바울은 현세의 사람들이 신의 권력을 위탁받은 성직자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4) 한편 역사 이전의 시기부터 인간은 서로에게 가혹한 폭력을 가하면서 스스로를 ‘약속을 할 수 있는 동물’로 만들어왔다. 즉, 본래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의 노예로서, 약속을 기억할 수 없는 존재였던 인간이 잔인한 규율을 스스로에게 적용한 끝에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러한 폭력을 ‘문화’라 칭했다. 이때 문화의 운동은 개개인을 국가나 교회의 권위 아래 엎드리게 하는 반동적인 힘과는 구분된다. 이는 과거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지켜야 할 약속은 잊지 않으며, 외부의 자극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기억’이라는 의식을 만드는 운동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다. 중요한 것은 약속이 만들어진 과거의 특정한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인간만의 특성으로 자랑하는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사려분별은 사실은 사회가 인간을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동물’로 만들기 위해서 개인들에게 행했던 잔인한 형벌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즉,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문화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5) 이러한 폭력이 낳는 고통은 내면화된 형태의 고통인 양심의 가책과 달리 ‘외적’이다. 이러한 종류의 외적인 고통으로 단련된 인간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반동적인 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동성을 얻게 된다.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반동적인 힘에 의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렇게 내면화된 고통으로 말미암아 반동적인 힘에 종속되는 기독교의 메커니즘과 반대된다고 볼 수 있다.
6) 하지만 역사 속에서 승리를 거둔 건 후자의 메커니즘이다. 역사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낳는 문화와 달리 우리에게 인종들, 인민들, 계급들, 교회들과 국가들을 제시했다. 역사 속에서 폭력은 종교과 국가의 권위 아래 종속된 약자와 노예를 길러내는 데 활용되었을 뿐이다. 마치 반동적인 힘이 능동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분리하듯이, 역사는 문화를 그것의 근원적인 의미로부터 분리시킨다. 니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에서 구제불능의 저주받아야 할 죄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신은 신이라는 무한히 선한 자 앞에서 자신의 절대적인 무가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러한 죄에서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채권자인 신뿐이라는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니체는 기독교인이 신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죄의식이야말로 인간 속에서 창궐했던 병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라고 말하고 있다.” (p.174)
“반동적인 인간은 신을 살해하고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이제 그는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그 어떠한 가치도 더 이상 알지 못한다…신의 살해자는 반동적인 인간이며 가장 추악한 인간이다.” (p.183)
니체는 영원불변하는 신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종교라는 기존의 가치 체계에 순응하는 자들을 반동적인 자들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왜 니체는 신의 살해자를 “반동적인 인간이며 가장 추악한 인간”이라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니힐리즘의 두 가지 종류를 알아야 한다. 첫째, 신이 존재하는 참된 세계가 현실적인 삶의 우위에 있다고 보는 니힐리즘이 있다. 이는 ‘부정적인 니힐리즘’이다. 둘째, 영원불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와 도덕은 허상이며 현실적 삶이 실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세계에는 어떠한 의미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 ‘반동적인 니힐리즘’이다. 반동적인 힘은 모든 의지를 무의미한 것으로 부정하며 인간을 허무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빠뜨린다.
니체는 신의 죽음이 이러한 반동적인 니힐리즘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고 보았다. 니체는 자신의 힘을 긍정하지 못한 채, 타자에 의해 반응하는 것을 “반동적”인 힘의 작용으로 보았다. 신을 죽인 인간, 즉 근대적 무신론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신이 던지는 연민의 시선이나 양심의 가책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신을 죽였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힘에 이끌린 인간이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지만, 여전히 신의 부재를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신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다. 즉, 니체는 가치를 전복했으나, 그를 통해 가치의 창조를 하지 못한 자를 ’신의 살해자이자 반동적인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신으로 대변되는 고차적인 가치도, 신의 자치에 앉으려 했던 자신의 노력도 모두 헛되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의지를 부정하는 인간이 출현한다. 니체는 그렇게 수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다. 한편 니체는 그리스도와 부처가 이러한 최후의 인간에게 고귀함을 부여한다고 말하며, 불교가 유럽 전역에 번지는 것을 우려했다. 즉, 니체는 부처가 말하는 무욕적인 삶과 그리스도가 말하는 복종과 체념의 미덕으로 인해 최후의 인간이 더 이상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려고 하는 반동적이고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까 봐 우려한 것이다. 그는 반동적인 자가 두 성인의 가르침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쾌감을 발견하고, 수동적이고 자족적인 삶으로 빠져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니체에게 그리스도와 부처는 반동적인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견디도록 돕는 최후의 미학가였다. 그들은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의미와 쾌락을 찾게 함으로써 인간이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에 따르면, 니체가 슈티르너를 넘어서는 지점을 파악하는 것이 “초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니체의 관점에서 헤겔은 신을 살해한 반동적인 인간의 전형이다. 헤겔은 신의 자리에 국가나 절대정신을 세움으로써, 현실적 삶과는 유리된 피안의 세계를 건설하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니체와 슈티르너는 헤겔뿐만 아니라 포이어바흐, 마르크스와 같은 헤겔 좌파들도 여전히 ‘인류’나 ‘유적 존재’와 같은 추상적 실체를 절대화함으로써 그 형이상학적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상 사회 또한 개개인의 삶을 소외시키는 피안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슈티르너는 그러한 자기 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변증법을 끝까지 밀어붙여 ‘절대정신’이라는 외부적인 실체를 ‘자아’로 치환했다. 모순이 발생했을 때, 그 대립을 지양함으로써 더 높은 단계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의 운동 원리이다.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이를 자기 소외와 소유의 문제로 탈바꿈했다. 즉, 모순의 운동이란 자기 밖으로 나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외화된 것)을 다시 자기 것으로 되찾는(재전유) ‘소유권 회복’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소유권의 회복을 추동하는 것은 ‘원한’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대신, 기존의 가치 체계 하에서 자기가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게 바로 자아의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관점에서 슈티르너의 자아는 자유로운 창조자가 아니라, 여전히 ”소유의 복수심“에 갇힌 원한적 자아이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로서의 자아는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아무것도 생성하지 못하는 반동적 니힐리즘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변증법을 끝까지 밀어붙여 그 한계를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변증법을 넘어설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니체는 이러한 슈티르너의 한계를 극복했다. 이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대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라는 개념이다.
대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니체는 변증법의 논리에 갇힌 존재를 낙타라고 보았다.
니체에게 낙타는 ‘정’의 단계에 있는 존재이자, 이미 정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 유령을 짊어지고 가는 존재다. 그는 신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신의 도덕과 양심의 무게를 지며, 그것을 자신의 의무로 착각한다. 그는 부정을 통해 종교에 귀속되어 있던 가치를 자신이 탈환해 왔다고 믿지만, 가치들에 억눌려 사는 삶은 반복된다.
그렇게 신의 명령과 인간적 의무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던 낙타는 끝내 지쳐서 “그저 사라지기를” 원하게 된다. 이게 바로 앞의 글(1편)에서 언급한 무에의 의지에 사로잡힌 원한적 자아이다. 한편 이러한 낙타의 부정은 반동적인 부정이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대신, 자신이 짊어진 무게와 고통이 싫다는 반응적인 기준에 따라 삶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존재를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다.
그런데 니힐리즘의 끝을 맛본 최후의 인간(낙타)이 무에의 의지와의 동맹을 끊어내는 순간, 그 존재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파괴하려는 욕망을 품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존재를 니체는 ‘사자’ 혹은 ‘몰락하기를 원하는 인간’이라 불렀다. 사자의 부정은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능동적인 부정이다. 헤겔이 정->반->합의 단계를 통해 부정을 해소하려고 한 것과 달리, 니체는 가치 전환 이후에도 부정이 능동적 힘을 위해 복무한다고 보았다. 즉, 니체가 바란 것은 부정의 소멸이 아니라, 부정을 긍정을 위해 자신의 내적 리듬으로 삼는 상태다. 니체의 긍정은 헤겔식의 종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면서 힘의 위계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초인은 이러한 두 가지 부정(낙타의 부정과 사자의 부정)을 거친 뒤에야 탄생할 수 있다. 니체는 그러한 준비를 마친 자, 즉 낙타의 복종과 사자의 부정을 모두 통과한 자를 ‘차라투스트라’라고 불렀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초인 그 자체가 아니라, 초인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인간”이다. 그는 아직 완성된 긍정의 인간이 아니지만,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할 준비가 된 인간이다. 그의 몰락은 종말이 아니라 창조의 전조이며, 그 몰락 속에서 비로소 초인이 태어난다.
1) 테세우스, 차라투스트라, 디오니소스: 들뢰즈는 ‘더 높은 인간’과 ‘초인’의 관계를 테세우스와 디오니소스의 관계에 비유한다. 여기서 테세우스는 외부의 질서(신, 도덕, 진리)에 종속된 사랑을 하는 영웅적 인간의 전형이고, 그런 테세우스를 사랑하는 아리아드네는 ‘경외’라는 이름의 무거운 원한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다가올 때, 아리아드네는 경쾌함을 아는 존재이자 긍정하는 ‘아니마’가 된다. 이렇게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는 이중 긍정의 쌍을 이루며, 이들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리듬 속에서 초인이 태어난다. 의무와 도덕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낙타적 존재인 테세우스와 모든 차이와 고통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의 사이에 차라투스트라가 있다. 그는 ‘사자의 부정’에서 ‘어린아이의 긍정’으로 나아가는 리듬을 이끄는 자이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완전한 긍정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디오니소스의 예언자라 할 수 있다.
2) 초인의 특성: “생성은 존재가 되고 다수성은 단일성이 되고 우연은 필연이 된다.” “변증법이 드러내는 대립과 모순은 차이의 왜곡된 이미지이다” (p.208) 위 문장들이 말하듯, 니체적 초인은 어떤 ‘합일’이나 ‘종합’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차이와 다수성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부정을 통해 모순의 해소와 통일(합)을 지향했다면, 니체의 초인은 부정을 해소하지 않고 긍정 안에 내재화한다. 초인의 특성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힘 사자의 “아니요”가 어린아이의 “예스”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초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는 파괴를 긍정하는 걸 넘어, 이를 생성의 기반으로 삼는다.
②다수성과 우연, 생성의 긍정 초인의 내부에서는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일자, 존재, 필연이 다수성, 생성, 우연에 통합되어 있다. 이는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의 윤리, 모든 우연을 필연처럼 사랑하는 태도로 연결된다.
③웃음과 유희의 긍정 디오니소스의 긍정은 춤, 웃음, 유희로 표현된다. 웃음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그 고통을 긍정의 양분으로 전환하는 행위이다. 초인은 유희의 능력으로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고, 그 힘으로 늘 승리한다. “유희하는 자는 충분히 긍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우연 속에 부정적인 것을, 생성과 복수성 속에 대립을 끼워놓기 때문에 패배할 뿐이다.” (p.214) 초인은 한마디로 말해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인간의 형상 안에서 실현된 상태이다. 즉, 부정을 긍정으로 삼는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자, 삶 그 자체가 ‘예스’가 된 인간을 초인이라 할 수 있다.
3)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초인이 지향해야 할 어떤 고결한 형이상학적 가치가 아니라, 그의 존재 방식이다. “존재는 생성으로부터 온다. 존재는 생성의 긍정이 또 하나의 긍정의 대상인 한, 생성 내에서 자신을 긍정한다. 이와 함께 생성은 존재가 되고 다수성은 단일성이 되고 우연은 필연이 된다.” (p.208) 이는 영원회귀가 단순히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긍정의 수레바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의 수레바퀴 속에서 삶을 억누르는 원한, 죄의식 등은 소멸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복수성, 웃음만이 영원히 반복된다. 이러한 회귀의 리듬을 만드는 게 바로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가 “영원회귀를 구성하는 쌍”으로서 만드는 이중 긍정이다. 영원회귀는 존재론적으로는 긍정 속에서 생성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윤리적으로는 삶의 모든 순간을 다시 원할 수 있을 만큼 긍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미학적으로는 웃음과 춤, 유희로 나타나는 긍정의 리듬을 뜻한다. 즉, “몰락하기를 원하는 자”로서 초인이 될 준비를 마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예언자이며, 디오니소스는 니체가 말하는 긍정의 원형이고, 초인은 그 긍정이 인간 안에서 완성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 셋을 연결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리듬이자, 삶을 예술로 바꾸는 반복의 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