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책장』(휴머니스트, 2025)을 읽으며
일전에 말했듯이, 나는 소설 속 여성 캐릭터에 나를 대입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여성 인물 중 시대정신의 정당한 계승자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기꺼이 그 자리에서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 여성 인물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그래서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제인 오스틴에게는 솔직히 큰 관심이 없었다.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은 최소한의 교양을 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었고, 당연히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제인 오스틴의 책장』을 읽으면서 그 작품들을 다시 한번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 오스틴이야말로 개개인에게 강한 구속력을 행사한 시대정신 위에서 자유로운 곡예를 펼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은 주로 소박하고 정적인 분위기의 교외 지역을 소설의 주요 무대로 삼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혁명과 전쟁, 산업화의 시대였다. 모든 격변의 중심에 있던 계몽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 균열을 낸 것은 낭만주의였는데, 이러한 과도기 속에서 여성들은 주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희생양으로 그려졌다. 이들은 오필리아의 후예로서, 주로 감정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 힘을 경고하는 망령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은 자신이 창조한 여성 인물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스틴의 여성들은 대부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용주의적 태도를 바탕으로 견고한 행복이 보장된 길을 택했다. 이들은 당대의 여성상을 거스르는 행보를 보이진 않았지만, 이는 도덕적 규범에 대한 순응이라기보다는, 여성들에게 유독 파괴적으로 작용한 낭만주의의 폭풍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다.
즉, 제인 오스틴은 혁명과 전쟁을 추동한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유산을 활용해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을 지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지나치게 소박한 주제에 몰두했다는 평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소박함은 거대한 시대적 유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중의 인물들은 때로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등 감정에 휘둘리기도 했으나, 이는 모두 ‘합리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일상 속의 작은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은 그 소용돌이를 구성하는 감정을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일상이 지닌 역동성을 실감하게 해 줬다.
『제인 오스틴의 책장』에는 섭정공의 사서가 작센-코부르크 왕가에 대한 역사소설을 써볼 것을 권했을 때, 오스틴이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저자는 자신의 문체를 잃지 않으려는 절개를 제인 오스틴의 가장 큰 미덕으로 꼽았다.
나는 이것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오만한 편견과 달리, ‘여류‘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정당한 시대정신—계몽주의적 합리성의 계승자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한 시대가 남긴 유산을 활용해 당대의 여성들에게 낭만주의로부터 비켜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제시한 대안—개인주의적 삶은 또 다른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과거의 유산을 활용해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은 그 누구도—특히 상류층 남성 작가는 모방할 수 없는 곡예를 펼쳤다. 이제부터 나의 ‘오만과 편견’을 걷어내고 제인 오스틴을 새롭게 읽어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