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과잉으로서의 트라우마

《유령 연구》 완독 후기

by 올가의 다락방

드디어 《유령 연구》를 완독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세 편의 영화(<작은 연못>, <고지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와 여러 다큐멘터리 영상들을 봤고,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다룬 강석경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난 늘 고통을 묘사하는 텍스트를 읽으면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이 종이에 베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온몸에 크고 작은 통증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앞서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이야기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책이 장애학적 관점에서 갖는 의의에 관해 말하고 싶다. 보통 정신장애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는 유년기에 얻은 결핍의 산물로, 뇌과학적 관점에서는 신경화학적인 손상의 결과로 여겨져 왔다. 반면 저자는 너무 많은 사건이 한 인간에게 기입된 결과 나타나는 게 정신장애라고 본다. 즉, 주체의 처리 능력을 초과하는 과잉된 경험이 조현병과 같은 과부하의 상태를 낳는다는 것이다. 과잉된 경험과 트라우마는 사회문화적 격변 속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신질환은 그 자체로 단순한 개인사(정신분석학)나 손상(뇌과학)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역사적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레이스 M. 조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과잉에는 트라우마를 보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낼 잠재력“(p.320)이 있다고 주장한다. 조현병 환자가 듣는 환청과 그가 내뱉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아직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흘러넘치는 기억으로서 재조명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기억들을 어떻게 ‘사료화’할 수 있을까? 저자는 역사적 상처와 그 상처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해 먼저 말한다. 중요한 건 타인의 서사를 내가 이해하고 범주화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하지 않는 동시에, 그 타자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타자와 동일시될 수 없고,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중요한 건 그 불가해성을 견디면서 타자가 나의 자리로 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타자에게 나의 자리를 내주는 것은 내 삶의 경계와 위치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동일시될 수 없는 타자가 나의 위치를 흔드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걸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적 책임이 생성되는 위치로 이동해 트라우마를 역사화할 수 있다.


그렇게 비밀에 부쳐진 말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던 말들이 역사화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흘러넘치는 기억을 역사의 범주에 넣는다고 해서 유령이라는 이름의 트라우마와 정신장애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유령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때, 트라우마의 근원을 쫓는 새로운 사회적 실천이 확립될 수 있다. 나는 일전에 쓴 《유령 연구》 후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실증주의적 관점하에 보기 좋게 정리된 통계 자료로는 절대 포착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료가 없으면 역사는 성립할 수 없다’며 뒤로 물러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사료화’할지 고민해야 한다.”



정신장애 당사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사료화’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검증된 객관적인 사료만을 다루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에 도전한 저자 그레이스 M. 조는 트라우마를 지나치게 ‘개인화’하는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제거하는 신경화학적 관점의 한계를 짚는다. 《유령 연구》는 정신장애인을 변화의 잠재력을 품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 본다는 점에서 장애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텍스트이다. 책의 일부를 발췌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트라우마를 병리의 영역에서 꺼내 일반적인 인간 주체성의 조건으로 재개념화 하듯, 나는 조현병을 꾸준히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배회당하는 역사의 목소리와 함께 진동하는, 디아스포라 무의식의 일반적인 기억 양상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배회당하는 역사의 목소리들 역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과거의 과거로부터 발화하고, 불확실성의 그늘 속으로 기원을 던져 넣는다.” p.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