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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삼천일백서른번째 어른 날

2017 03 09

여전히 방은 어지럽혀져 있다. '바쁘다'에 기대 온 탓이다.


사실 회사원이자 대학원생이라는 복잡한 직책에서 벗어난지 이제 채 보름도 안되었다. 한 숨 돌릴만도 한데 저번 주말에는 억지로 자격증 시험을 보기로 했었다. 당연히 붙을리가 없었다. 익숙한 디자인에 대한 자격도 아니었고 겨우 첫 발 뗀 공학 전공 시험인데 책 한 번 펴보지도 않았다. 그때도 또 나는 '바빴다'.


그 핑계는 의외로 여기저기에 게으름을 피우는기에 좋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남자친구에게 조금 짜증을 내어도 됐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의 저녁을 혼자 드시게 한 것도 같다. 그렇게 난 바쁘다는 핑계로 바쁘지를 않았다.


내가 그 핑계로 바쁘지가 않을 때 내가 했어야 하는 일들은 오히려 간단했다. 고양이 발톱을 정리해주거나 어머니의 컴퓨터를 봐주는 일 그리고  남자친구와 단 디저트를 나눠먹는 그런 일들이었다.


나는 참 언제나 시간보다 더 마음이 바빴다. 쉬는건 안될 것만 같았다. 내 일에 이미 누군가를 가르칠만큼 전문가가 되었지만은 조금이라도 쉬면 버려질 것 같고 다시는 누구도 날 찾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늘 초조함이 섞인 욕심에 늘 곧 무너질 것만 같이 바빠왔다. 그래서 더 강해보여야했고 웃음이 잦아야 했다. 눈물이 핑 도는 그런 순간마저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내가 날 도닥인 날들이 몇 밤인지 억지로 눈물을 참은 날들이 몇 밤인지 모르겠다.


괜찮다고 외운 수만큼

의외로 나는

썩 괜찮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아무에게도 못했다. 서른이 넘도록 다 못자란 나는 버텨내는 둘째딸이어야 하고 인생에 전문가인 어른이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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