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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삼천일백마흔네번째 어른 날

2017 03 23

아버지는 내 어릴적부터 술을 좋아하셨다. 설게 잠이 든 날엔 종종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의 발걸음이 층계를 올라오는 것이 들렸다. 그런 날의 아버지는 어린 아이처럼 거실에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우리를 보고 껄껄거리곤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좋았다. 까슬한 수염에 볼이 긁혀도 아버지가 웃는다는 그것이 좋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널부러진 아버지의 자켓을 걸며 한숨을 쉬곤 하셨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나는 무서웠다.


원채가 살갑지 않은 집에서 웃음 소리가 들리는 날을 왜 싫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몸을 가누지 못할만큼 술을 드신 날에는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흔한 과자 한봉지도 없이 그게 부끄러워 아버지는 술을 드셨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패물을 하나씩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내 어린 날의 어머니는 뒷모습뿐이었다. 언제나 바빴던 어머니는 주로 부엌에 계셨다. 쌀을 씻었고 설겆이를 했고 싱크대의 물을 훔치며 눈물까지 훔치셨던 걸까.


문득 아무 날도 아닌데 초코케잌을 산 날 그 어린 어머니가 떠올랐다. 고운 집에 살던 고운 어머니는 갑자기 견뎌야 했던 그 모진 시간들이 떠오를때면 아직도 목소리가 묽어지곤 한다.


겨우 내 나이었던 어머니도 예쁜 옷을 사고 뾰족 구두도 신고 싶으셨겠지. 가끔은 아무 날도 아닌 날에도 먹고 싶었던 케잌을 하나 사고 싶으셨던거겠지...


아무 날도 아닌 날 그냥 초코케잌을 사면서 어쩐지 나는 갑자기 쑥 어른이 되어버린 것같았다. 이미 한참 전에 되어 있었던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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