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해서 살다 보면 누구나 하는 뻔한 감상이 있다. 물때 없이 깨끗한 변기나 뽀송한 수건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선반이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나도 그랬다. 문제는 그 정도가 다가 아니라는 거였다. 조금 더 살다 보니 슬금슬금 깨닫게 된 자취 살림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비밀들이 있었다.
하나, 쓰레기통은 '그것'이 중요하다. 모든 집안일 중 가장 귀찮은 일은 쓰레기(음식물쓰레기 포함) 처리다. 입주한 첫날, 가까운 홈플러스에서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을 샀다. 비 오는 날 한 손엔 우산을 한 손엔 큰 쓰레기통 박스를 짊어지고 끙끙대며 집에 들어온 기억이 난다. 언니와 살 때는 뚜껑이 있지만 직접 닫아줘야 하는 엉성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썼었다. 그래서인지 발로 밟아 뚜껑이 열리고 자동으로 꽉 닫히는 튼튼한 스뎅(?) 쓰레기통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쓰레기통은 작은 원룸 입구 한 구석에 위풍당당히 놓였다.
그런데 몰랐다. '크기'까지 생각해야 할 줄은. 1인 가구에게 20L짜리 종량제 봉투가 들어가는 쓰레기통은 너무 컸다. 나는 다른 집들이 몇 리터 봉투를 쓰는지 잘 몰랐다. 쓰레기통이 크면 자주 안 버리러 가고 좋은 거 아닌가? 어차피 뚜껑도 잘 닫히고. 단순했다. 늦봄쯤 날파리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엄마에게 전화로 20L짜리 쓰레기봉투를 쓴다고 했더니, 지금까지 너 혼자 그런 큰 봉투를 썼냐며 놀라셨다. 특히나 여름철에는 벌레가 꼬여서 일반 가정집도 작은 용량의 봉투로 바꿔 쓴다고... 아무리 뚜껑이 잘 닫혀도 혼자 살면서 20L짜리 봉투를 쓰면 다 채울 때까지 쓰레기들이 집에 그만큼 오래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는 10L짜리 쓰레기통으로 바꿨다.)
둘, 요리에 장비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필수조건이다. 모두가 첫 독립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는 신나게 집들이를 하며 배달 음식에 취한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집밥이 당기고 계란 프라이, 참치 캔, 김 하나 조촐하게 놓고 밥을 차려 먹는다. 좀 더 탄력을 받으면 김치찌개, 제육볶음, 계란말이 정도까지 해본다. 딱 이 단계 즈음 다시 집밥 요리를 포기하기 쉽다. 좁은 원룸 부엌에서 한 번 뭘 차리고 나면, 별것도 아닌 요리에 설거지가 산처럼 쌓이고, 음식물 쓰레기도 생기고, 장 봤던 재료도 남아 돌아서 냉장고 청소도 귀찮고, 결과적으로 이래저래 들이는 노동에 비해 그다지 비용이 세이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장비'를 갖추게 되면 상황이 반전된다. 요리 세계관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좀 있어 보이는 요리를 하고 싶어 유튜브나 블로그에 레시피를 검색하면 나오는 좌절의 단어들이 있다. 파슬리, 레몬즙, 페퍼론치노, 맛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등등. 레시피에서 '없으면 생략 가능'으로 치부되는 재료들. 이 요리 하나 만들고자 이걸 산다고? 그냥 없이 하지 뭐. 생략해도 된다 잖아. 내 경험상 생략하고 만든 결과물과 없으면 생략 가능하지만 꼭꼭 챙겨 넣은 결과물은 하늘과 땅 차이다. 게다가 '없으면 생략 가능'인 재료들을 하나 둘 생기면 할 수 있는 레시피가 많아진다. 아무리 엄마 집밥을 좋아해도 현실적으로 한식만 해 먹긴 힘들다. 한식은 기본적으로 한 그릇 요리가 어려워서 1인 가구가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없으면 생략 가능'한 재료들은 양식, 일식에 골고루 쓰여서 갖춰 놓으면 굉장히 유용하다. 오븐도 마찬가지다. '오븐 없이' 전자레인지로 ~만들기 레시피가 쏟아지지만 그래 봤자 '오븐 있이'한 레시피를 따라가기 어렵다. 오븐이 생기면 그만큼 오븐으로 할 수 있는 요리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몇 번의 출혈로 다양한 장비를 갖춰 두면, 이후부터는 장 봐 뒀던 남은 재료들을 써먹을 요리가 많아지고 외식보다 맛도 뒤처지지 않아 집밥의 가성비가 좋아진다.
셋, 이불 빨래는 쉽지 않다. 특히 겨울에. 본가에 살 때도 건조기가 없어서 엄마가 이불 빨래를 하시면 큰 건조대에 널거나 거실 바닥에 깔아 두셨다. 혼자 살면 큰 건조대가 없는 건 당연하고 바닥에 이불을 깔면 아예 걸을 바닥이 없으니 옴짝달싹 못한다. 나는 그나마 복층에 살아서 이불 건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복층 난간에 걸어두거나 복층에 깔아 두면 되니까. 이렇게 이불 빨래는 '건조'에만 큰 초점이 맞춰지곤 하는데 예상치 못한 더 큰 난관이 있다. 겨울 이불은 원룸에 빌트인으로 들어가 있는 작은 드럼세탁기에서 안 빨린다는 것. 솜이 두꺼운 이불이 너무 뚱뚱해서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입주를 해서, 짧게 생활했던 이불과 작별하면서 이듬에 봄에 세탁기에 넣고 이불 빨래 모드를 시작했다. 한 20분쯤 남은 상태를 체크하고 분명 한참을 기다렸는데 여전히 똑같은 시간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몇십 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그 상태였다. 공간이 비좁아 제대로 된 헹굼과 탈수가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집 바로 앞 '코인 빨래방'에 갔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코인 빨래방의 이름이 왜 '코인' 빨래방인지 모르겠다. 이불을 세탁하고 건조기에 건조까지 하려면 1만 원 가까이의 돈이 필요했다. 굳이 이 돈을 '코인'으로 받는 이유가 뭘까? 그냥 지폐나 카드로 받아주지. 나는 현금을 아예 안써서 급하게 ATM기를 찾아서 만 원을 뽑았다. 그리고 코인 빨래방 동전교환기로 500원짜리 동전 20개로 바꿨다. 굳이 짤랑대는 동전으로 바꾼 덕분에 손에는 동전 쇠냄새가 가득 났다. 몇 십번 동전을 밀어 넣어 세탁기를 돌리고 다시 집으로 갔다.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다 세탁이 다 되었을 즈음 다시 내려갔고 이번엔 건조기에 넣었다. 또다시 집으로 올라 갔다가 다시 건조 완료 시간에 맞춰 찾아왔다. 다행히 결과는 만족스러웠는데 생각보다 비싸고, 잘 쓰지 않는 현금도 뽑아야 하고, 왔다 갔다 번거로워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겨울 이불이 빨리지 않는 세탁기가 있다. 다음 겨울에도 깨끗하고 포근한 솜이불을 위해 나는 다시 코인 빨래방에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