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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yselfolive May 21. 2017

About | 이직과 새로운 시작

Olive, Be Bold and Stay Cool

2017년 5월, 나의 인생 역대 변혁을 시작합니다.

담대하고 담담하게...

#스무살
스무살이 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그 설레이는 순간을 기다리던 소녀는 어느새 서른을 지나, 마흔두살의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딸은 열살의 소녀가 되었다.

#대학
문학을 좋아하던 나는 국문과, 영문과, 독문과 순서로 원서를 적어내려하자, 진학 진로하던 교무실에서 옆에 앉아 계시던 국어선생님께서 국문과에 가면 굶어죽는다며 손사래를 치고 원서 쓰는 것에 참견을 하시는 통에, 볼맨 소리로 대학은 하고 싶은 학문을 공부하고 싶어 가는거라며 국문과를 고집하며 원서에 꾹꾹 눌러 적어놓고 뒤돌아서 나왔던 그 순간이 기억이 난다. 1995년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고, 라일락 향이 가득했던 유난히 아름답던 나의 캠퍼스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스무살의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 내 삶의 꿈의 최고를 이룬 것만 같았던 순간들이었다. 기대하고 기대했던 교환학생의 기회를 도전하고 싶어 받았던 미국 비자를 받아들고 98년 IMF 는 내게 불가항력적인 변화의 꼭지점이었다. 그 무렵 그 때 그 교무실에서 그 선생님의 손사래가 여러번 기억이 났다.
많은 친구들이 대학원 진학과 진로의 고민들로 숱한 술잔을 기울였던 그 시절, 도대체 무엇에 이끌렸는지 기업이미지 전략과정이라는 새로운 수료 과정 모집에 대한 포스터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지원을 하고, 1기 학생이 되어 휴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1년을 열심히 3학기 과정을 마치면서, 그 안에서 다양한 나이의 선배들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 다양한 고민들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의 서른의 그 해들에 대한 고민들이 더욱 깊어지는 시절이었다. 그 일년간 내가 얻은 분명한 하나는 "태도"와 "열정"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나의 선생님들은 다양한 기업의 멋진 포지션의 이름답게 그저 멋지고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분들이었다. 닮고 싶었던 사람들. 그렇게 해서 나는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바라보게 되었다.

#1999년 #취업
1999년 나는 취업을 앞두고 있었고, 국내 대기업들이 취업설명회에서 "여자"라서 "문과"라서 안된다며 지원서조차 배부하지 않았던 그 순간들의 모멸감때문이었는지, 막연히 이루지 못했던 교환 학생의 꿈이 목메어 그랬던 것인지 나는 내노라하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들의 지원서를 받아 지원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왜 그것이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순간들이라 몇몇의 지원서는 그대로 나동그러졌고, 그저 "태도"와 "열정"만 있으면 되리라 생각했던 그 시절 젊은 나의 "패기"는 그렇게 여러번 바닥으로 고꾸러졌다. 그리고 어느 아침 복잡한 지하철, 앞자리 앉은 한 어르신의 신문에서 마주한 작은 쪽광고로부터 나의 커리어는 시작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에 취업을 한다는 것, 그것은 딸 셋의 큰딸로 지난 스물몇해를 우리 집안의 모든 기대를 한몸으로 받아오던 나에게, 그 기대가, 그 시간들이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기도, 그리고 감사한 일이기도 했다. 이후, 나의 엄마는 수화기 너머 친구에게 우리 딸의 회사를 이십분 넘게 힘겹게 설명해야 했고, 그러한 엄마아빠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믿음이 지금까지 삶에서 가장 고마웠던 순간으로 떠오른다.
 
 # 첫 회사
나의 첫번째 회사, 디킴스커뮤니케이션은 온라인 광고 대행사를 시작한 벤쳐기업이었기에, 나에게는 매번 기존에 없던 일들, 새로운 일들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곳들이었다. 기존에 주어진 일들을 익혀 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던 그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나의 삶에 에너지를 주고 신이 나는 것인지 나는 그렇게 몸에 익혀가기 시작했다.

# 그 때였기에 가능했던 무모한 도전

새로운 비즈니스가 매순간 태어나고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러해보겠다며 새로운 시작을 하시고자 했던 지금의 내 나이쯤의 선배들을 따라 첫 회사를 떠나, 우리의 회사를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무엇이 나를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지를 배우게 해주었던 그 곳. 비록 일년의 시간을 넘쳤다 버티었다 넘어졌다 울어도보고, 행복해했던 그 격한 시간들을 보냈던 그 곳. LHMNP.


# 내 인생 가장 우울했던 6개월

폐업 신고를 하고, 책상과 모니터들을 팔고 그랬었던가.. 그런 기억이 흐리게 남아있다. 그냥 무언가로부터 다 도망가고 싶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자취방도 정리하고 일산 엄마아빠 집에서 한달가량 하릴없이 지내며 명분 하나가 캐나다에 간다였다.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산 캐나다 벤쿠버행 편도 비행기표. 9월 12일. 전날 싸놓은 짐을 뒤로 하고 가족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는 누워서 뉴스를 켰는데, 꽝!하니 비행기 하나가 뉴욕 빌딩 하나에 그대로 가 박는다. 무슨 영화인가 했다. 그리고는 2개월동안 내 비행기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또 2개월을 하루에 비디오를 3개씩 빌려보며 그냥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11월 3일 나는 내 인생 스스로 처음인 그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 곳에서의 3개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을 하루에 수천번씩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아무것도 안하는 삶이 이어졌다. 밤새 피씨방에서 카운터스트라이크를 하고 낮이 다 되도록 늦잠을 자고, 다시 어두워진 벤쿠버의 겨울을 맞이하며 침대 밖으로 나와 다시금 어둠과 함께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그런 시간 중, 어느 순간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던 질문은 "어떻게 살것인가" 그리고 뜨거운 열망 "무엇인가 하고 싶다. 일을 하고 싶다"였다. "오늘 밤에 죽는다해도, 그 순간 그래 지금 이 순간까지 잘 살았다고 나를 칭찬해줄 하루를 살고싶다"였다.


# 다시 시작, 일어서다.

3개월을 그렇게 지내다가 그 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피씨를 포맷해드리고, 작은 도움들을 드리면서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일하고 싶다 오늘 당장부터" 그 마음으로 여러 회사들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세번째 회사, 하나로드림을 만났다. 얼마나 신나서 일을 했겠는가. 그 곳에서 일하는 즐거움을 다시금 얻었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렇게 3년을 그 곳에서 보냈다.


# 세상으로 한걸음

나의 네번째 회사, 오버추어는 내 인생에서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곳이라고 십여년이 넘도록 이야기하고 떠올린다. 그 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그 곳에서의 나의 도전들. 그 곳에서의 동료들, 선배들, 후배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그러함에 있다. 회사가 바라보는 Thought Leadership 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었던 첫 회사였고. 언제나 Beyond it 을 꿈꾸고 해낼 수 있음을 배우게 해준 곳이었다.

영어 면접을 처음 본 날. 얼마나 영어를 못하던지. 내 스스로가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은 초당 수천번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몇십분동안 나는 벌개져서 터지기 일보직전의 얼굴로 필사적으로 영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질문은 그저 한가지였는데. 내가 그 당시 회사에서 하고 있던 통합인증TFT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자기 소개 몇줄 외워간 걸로 마음 편히 갔던 나에게 그 당황스러움은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다.

떨어졌구나. 나는 영어를 시험보는것만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어떻게 문법하나 단어하나 제대로 맞지 않는 이런 엉망진창 영어를 하고 있었던가 하는 부끄러움에 면접이 끝나고는 거의 우울함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그리고는 합격을 했다. 출근 첫날, 면접을 보셨던 부장님과 차장님은 나를 보며 활짝 웃으시며 "영어를 진짜 못하더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또 한번 당황.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게 중요했지. 우리가 영어 시험 보는데는 아니잖어?" 하셨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면접관으로 들어갈때마다, 그들의 영어 능력이 아닌 당황스러운 그 상황에서 도망가는지를 보기 위해 영어 면접을 진행하곤했다.

입사를 하고 3개월, 회사에는 많은 외국인들로, 또는 한국인이나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해 나갔다. 물론 나는 영어 한마디를 쓰지 않고 숨어있었다. 정말로 한국 사람들 앞에서 영어 하기가 싫었다. 쟤 정말 영어 못하네 하며 웃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사이 같은 날 입사한 언니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입사하자마자 중요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나와의 격차를 벌려나갔다. 그렇게 3개월.

회사에서 한국에 없던 Job position의 채용을 진행하며, 내가 후보로 올라갔을때. 결심했었다. 내 인생에서 내가 넘지 못할 벽은 내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 일을 하게 되고, 바로 생애 처음 미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혼자 도착한 Pasadena, US. 그 때의 그 두근거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한 주동안 내게 주어졌던 40개의 미팅을 앞에 두고. 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사실 자신도 없었고, 너무 무섭기도 하고. 내가 이걸 못해내면 어떻게 되는것인가 걱정이 너무 되고. 그리고 나서 마음먹은 것이. 교과서도 통째로 외워가며 시험도 보았는데, 하루에 8개씩의 미팅, 한 미팅에 한장씩 영작하고, 외우자. 미팅에 들어가면 그 미팅에서 내가 궁금했던 것, 한국의 상황을 외운대로 줄줄 읊어댔다. 그리고는 이제 네 차례야 하고 넘기고는 녹음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미팅의 대본을 외우느라 바빴다. 그렇게 하루에 8개가 끝나면 저녁에는 8개의 미팅의 녹음 파일을 무자비하게 반복 재생하며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날 미팅 8개에 대한 대본을 영작하고, 외우는 그런 5일을 보냈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웃었다. 내가 해냈다. 내가 해낼수 있구나. 앞으로 잘할 수 있겠다. 그 스스로에게 치열했던 5일이 내게 준 선물과 같았다.

그 이후 나는 컨퍼런스 콜이나 발표를 여전히 열심히 사전에 준비하며 영작하고 외우고. 그렇게 7년의 그 회사의 시간이 지나고는, 영어가 내가 일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중요한 미팅과 발표는 사전에 스크립트를 쓰고 외우고, 정리하곤 한다. 여전히 영어는 내 완벽한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때문에 무엇을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이 회사는 그렇게 내게 어마어마한 선물과 같은 순간들을 주기 시작했다.

나의 팀이 생겼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마음을 길러주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이룬 작고 큰 성공들이 어떤 의미로 시장에, 우리들의 파트너들에게, 우리들의 고객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배우게 해주었고, 시장을 만들어나간다는 것. Thought Leadership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나의 리더들이 지지해준다는 것. 나의 동료들이 지지해준다는 것의 벅차오름을 선물해준 곳이었다.


그렇게 벅차던 그 곳에서의 7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나는 또 다음 걸음을 디딛기로 결심을 했다.


# Win their Hearts.

마이크로소프트. 이전 회사와 같은 건물에 있었던 마이크로소프트를 보면서 항상 저 안에는 내가 그렇게 많이 쓰는 파워포인트를, 엑셀을 만든 사람들, 또는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것인가? 만나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어린 아이처럼 하곤 했다. 그러다, 그 곳에서의 나의 삶이 시작하게 되었다.

회사에 들어가, 나의 업무에 대한 Statement를 받아들었을 때, 나는 이미 이 어마어마한 조직에 반해버렸다.

"WIn the Student's Heart"

심장을 얻으라는 이런 조직. 이런 곳에서 내 심장을 내어주고 누군가의 심장을 얻어야 하는 그런 가슴 뛰는 일을 하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나의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시작이었다.

Imagine Cup, Microsoft Student Partners, Microsoft Innovative Educator Experts, Microsoft Schools.

이 모든 순간에 내 앞에는 나의 "청중"들, 내가 심장을 얻어야 하는 나의 "연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향해 나의 마음을 내어주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울고 웃고, 뜨겁게 살아왔던 모든 순간이, 그들의 삶에 용기를 주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 내가 이 회사를 통해서 얻었던 세상 최고의 배움이었다.

마케팅을 한다는 것. 나의 회사가 가진 것을 통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을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는 모든 순간들이 그저 우리가 배운 마케팅 지식, 전술 등을 넘어서는 진정성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준 스승과 같은 회사였다.

이 곳에서 만난 모든 학생들, 모든 선생님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나와 함께 팀을 이루었던 나의 모든 인턴들, 나의 MSP들, 항상 기꺼이 나서주었던 나의 써포터즈들. 나의 믿고 지지해주었던 동료들, 보스들.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것. 그것이 이 회사를 떠날때 그 어떤 서운한 순간보다 머릿속을 가득채웠던 그 무엇이기도 하였다.

Empower Every People to Do More and Achieve More


# 나의 인생 후반전을 위한 여행

아이와 함께 긴 여름 휴가를 떠났다. 시애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Imagine Cup World Final 과 One Week 이라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의 해커톤을 함께 참여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와 구글과 페이스북, 스탠포드대학, 요세미티, 카멜을 들리는 보름간의 여행이었다.

여행 중, facebook HQ에서 나는 또다시 두근거림을 찾게 되었다.

사실 그 어느 서비스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잘 쓰는 서비스들을 갖춘 회사라는 것도 좋았지만, 이 회사의 구성원들이 가진 그 특별함이 좋았다. 마크나 가진 그 젊은 역동적인 리더쉽,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 대한 동감.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은 열망. 이러한 것들이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광장에서 만난 저 파란 의자들. 다음날 마크 주커버그와 직원들의 all-hands meeting을 위한 자리라는 소리에, 그냥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밤새 앉아있다가 다음날이 되어 나도 그들의 일원으로 그 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2016.8,1 여행중.. facebook HQ

함께 여행을 갔던 나의 공주와, 나의 똥강아지들 모두가 그 곳에서 흥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서현이에게 "왜 페이스북이 좋아?" 그랬더니.

"몰라 그냥 좋은데?!" 하는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다.

나도 그냥 좋았다. 그냥 그 곳에 함께 있고 싶었고. 그냥 함께 그 길을 걷는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

Thanks to my Princess. 너의 응원과 지지가 엄마에게 가장 큰 힘이란다.

그렇게 갈망했고 그렇게 열망했던 그 곳의 일원이 되기 위한 첫 발이 그렇게 떼어졌고.

2017년 5월 22일 나의 인생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되기 위해 지금 비행기를 탄다.


인생을 걸고 기대하고 있는 앞으로의 시간들.

더욱더 반짝이는 삶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뜨겁게 기대하며.


It is another beginning of my journey.

Be Bold, Stay Cool!

2017년 5월 도쿄, 레고랜드에서 내가 만든 페이스북 로고! Blocks by O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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