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나는 딸 셋의 "첫째딸"이다.
또한 나는 열살 나의 공주의 "엄마"이다.
그리고 나는 19년차 일하는 "여성"이다.
그간의 나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여자"라는 구분자가 붙어서 손해 본 적이 있는가하고 긴 시간을 뒤돌아보았다.
"절대 그러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우리집에는 갓난쟁이 우리 막내가 태어났다.
그 어린 시절, 나는 엄마에게 궁금했던 것이 있다. "왜 딸을 셋이나 낳았을까?"
그냥 나는 엄마아빠가 딸인지 아들인지를 골라서 낳고 싶은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했던 꼬꼬마였다.
그리고는 나 나름의 합리적 답변을 찾았던 것은,
나와 둘째 동생이 가지고 있는 많은 옷들, 물건들이 다 여자아이 것이니깐 엄마아빠의 합리적 소비를 위한 용단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나름 아주 합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며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던 그밤. 엄마의 불평을 들은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아들을 엄청나게 기다렸다는 것.
평생 엄마아빠와 함께 살아오면서, 나의 엄마아빠가 "아들"이라는 특정 성별의 아이를 원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때에도, 다 큰 지금도 해본 적이 없다. 사회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 딸의 머리끈까지 손수 사오시며 우리를 아껴주시던 우리의 온니넘버원 우리 아빠의 품에서 자라난 우리 셋은 한 번도 "남자"이지 않아서 서러워 본 적이 없는 바른 여성으로 자라났다.
2008년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공주라는 사실을 듣고 내 머릿속에 들었던 첫번째 생각이 "나와 같은 첫딸"이 될 나의 딸의 운명같은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첫째"가 아니라 "첫딸"이 특별하게 의미하는 것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 셋의 첫째 딸인 나는 딸 넷에 아들 하나 있는 집의 그 유일한 아들과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 13년동안 한번도 그 유일한 아들의 집의 며느리 역할이 별달랐던 적은 결코 없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얼렁뚱땅 엉망진창 며느리다.)
그저, 설날이나 추석에 매번 우리 엄마아빠는 왜 혼자있어야 하냐며 투정했던 신혼시절의 내가 생각났을 뿐이다. 결혼 전에는 신랑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설날에 시댁에 먼저가면, 추석에는 친정에 먼저가자는 둥 나름 평등을 주장하며 고집을 부렸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명절날 아침만 보내면 쪼르륵 친정으로 올라와 더 긴 연휴의 시간을 친정식구들과 보내곤 했다.
그럼에도 항상 명절의 시작에는 불편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첫째딸"이었다.
그것이 나의 딸에 탄생에 아이를 바라보며 "첫째딸"이구나..하는 작은 숨을 몰아쉬었던 이유였던 듯하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 생활을 한지가 어느새 23년이나 지났다.
갓난아이가 성인이 될 만한 시간만큼, 나는 사회에서 "Grown-up"해 왔다.
이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나는 "여성"이어서 부당함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나는 순간은 몇가지다.
밤늦도록 길어지던 대학 시절 술자리에서 동기녀석이 "여자가 늦게까지 무슨 술을!"하는 통에 대판 싸웠던 그 밤. (사실, 늦은 귀가길 나를 걱정해주던 소중한 친구였음을 알았지만.)
IMF 시절, 치열했던 취업 원서 전쟁통에서, 남자만 뽑는다며 원서 한장 주지 않았던 그 소심했던 인사팀 아저씨.
연말 평가를 앞두고 나를 불러 회의실로 들어가 "저 대리가 애 둘 딸린 가장이잖니" 라며 남자들의 고되고 치열한 삶에 대해서 이해를 부탁하며, 나의 고가를 굳이 깍아내렸던 그 해의 성과 평가를 받아들던 그 날.
이 세 번 말고는 나는 오히려 이거 원 "역차별"아닌가? 할 정도로 여성에 대해서, Diversity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고민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조직사이에서 내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보다 큰 어른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회가, 이 세상이 "여성"이기에 "Naturally" 요구되어 지는 많은 순간들이 완벽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이를 낳기 전날밤에도 나는 밤 12시까지 나의 팀원들의 성과 평가를 위해서 가득가득 하나하나 더 채우기 위해서 그 밤, 많은 에너지를 쏟아냈다. 그 밤과 그 다음날 사이 무슨 우주의 어마어마한 힘이 나에게 작용한 것인지. 아이 낳기 전까지는 3개월 후 출산휴가 복귀 후 다가올 해외출장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몇시간 뒤 아이를 낳고 나서, 하루하루가 지나고 아이의 백일이 하루하루 채워지면 질수록, 나는 내가 어떻게 이 상황에 해외출장을 갈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았던 남자들은 출장을 잘 가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출장을 간다.
나는 아이에게 8개월까지 모유수유를 했다. 회사를 나가서 유축을 하고, 그 보관해 온 모유를 냉동고에 얼리고, 내가 없는 그 시간에 아이가 먹고 자랄 수 있도록 아이와 떨어진 시간도 결코 아이와 떨어질 수 없는 "엄마의 삶"은 이어졌다. 그런데 해외출장이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출장을 가는 대신 그 서밋을 한국에서 하자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한국으로 출장오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솔루션을 만들어냈는지.. :))
그렇게 20개월의 시간을 매일매일 아침, 밤으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고민을 하며 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이 때부터가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20개월이 되었을 무렵, 4개월의 육아휴직을 냈다. 사실 사직을 하겠다는 나에게 그 당시 나의 대장님께서는 잠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지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라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때 내 일하는 삶을 포기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상상이 안 갈 정도다.
나의 대장님과, 결국 나의 엄마아빠의 적극적 희생으로 나는 다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 나는 더욱 뜨겁게 내 삶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엄마"이기에 나의 커리어에서의 여정을 멈추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매 순간 조금이라도 약해질 때면 내가 멈추는 그 순간이 내 딸이 나와 같이 "멈춤"을 고민하게 될 순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반드시, 나의 여성 후배들을 위해서도, 나의 딸을 위해서도 나는 반드시 일을 계속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지금 나는 내가 지나온 길들을 곧 쫒아 걸어올 나의 딸 아이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얼마전 주말에 앉은 자리에서 휘리릭 읽어내린 "82년 김지영"이라는 책. 대통령 선거에서 거론되었던 "슈퍼우먼방지법" 그리고 이번 출장길 비행기에서 본 "히든 피겨스". 그리고 나에게 문장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셰릴샌드버그 그리고 여성과 함께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부족하기에 좀더 목소리를 높이고, 좀더 버텨야하고 그러하다.
예전 엄마들은 항상 딸들에게 "나 같은 삶"을 살지 말라며 이야기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딸아이에게 "나 같은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멈추고 싶었던 때 멈추지 않았던 나를 응원한다.
어느 새 나는 누군가의 처음이 되어야 할 때를 맞이해 나갈 걸음걸음을 걸어가고 있다.
이제는 나는 "멈추지 않아야 할 때"다.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건강한 "여성"의 삶을 살아가리라고 마음 든든히 용기를 채워 세상에 나의 두발로 단단히 서있기로 한다.
2017.6.3 또 한번의 긴 해외 출장길 여정을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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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Bold and Stay Cool, O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