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경옥 Oct 06. 2021

올리브나무 사이로

학교에서 나와 만난 나의 아이들에게

 1. 교사가 되어     

 옛날의 이야기다. 서울시 국어과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응시한 일이 돌이켜 보니 까마득하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다. 몸이 쇠약해져 있던 아버지는 맏이의 앞날을 일단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먹고 산다’는 일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 2년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교사로서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단 한마디만 하셨다. “남의 집 귀한 자식 때리지 마라.” 지금은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 시절에는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에서 많이 맞고 자랐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버지는 우리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신 적도 없고 험하거나 비천한 말을 사용하신 적도 없고 매를 드신 적도 없다. 

 아버지의 ‘나의 학생들은 모두가 남의 집 귀한 아이’라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평생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2. 교사와 학생의 사이     

 처음 선생이 되고 나서 한 일은 종로서적에 가서 몇 가지 심리학책을 산 일이다. 사람들의 마음, 특히 학생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 다니면서 수강을 신청하지 않은 채로 철학과와 역사학과, 심리학과 등의 강의를 여러 번 들어보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도강(盜講)이라 부르고, 학점 받아야 하는 부담 없이 관심 있는 강의, 수강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구입한 책 중에 종로서적에서 발행한 하임 기너트의 『교사와 학생의 사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이 책은 밑줄을 그어 가며 여러 번 읽었다. 그 책을 다시 열어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학급을 원만하게 이끌고 나가기 위해 교사는 심리적으로 사소한 일면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대수롭지 않은 다툼, 갈등, 갑작스런 사건 등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을 효과적이고도 다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특별한 솜씨가 있어야 한다.’

 ‘엄격한 규율보다는 아이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

 ‘곤란한 순간일수록 교사는 지혜로운 처신으로써 학생을 구해낼 수가 있다.’     

 ‘다정하게’라는 단어에는 두 줄을 그어 놓았다.     


 거기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갔더니 누가 오렌지를 까서 먹고 그 껍질만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누가 그랬냐고 나오라고 소리 지르며 야단쳐야 할까? 아니다. 이렇게 하라고 써 있었다. “누가 오렌지 껍질을 여기 놓았느냐? 나는 껍질보다 알맹이를 좋아하니 다음에는 알맹이를 주렴.” 그러고 수업을 시작하면 된다고. 

 내 입장에서 그렇게 약간 오글거리게 대응하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중요한 일화로 마음에 담아 두었다. 아마도 나라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3. 3월 배정, 4월 발령     

 3월에 학교 배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배정과 발령이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어느 학교에 가서 근무하라기에 그것이 곧 발령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3월 월급이 없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교육청에서 배정만 하고 발령을 내지 않았단다.

 월급날이 지나서야 그 사정을 알고 교육청에 문의하였다. 서류 미비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내가 갖춰 내야 하는 서류도 아니고, 교육청에서 나의 모교, 대학교에 성적확인서를 요청했는데 그것이 교육청에 아직까지도 오지 않아서 발령을 못 내고 있단다.

 지난 12월, 졸업하기도 전에 임용시험을 보았고 합격자 발표일은 언제였는지 지금 잊었지만 아마도 1월 아니었을까. 그런데 아직까지 나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저러고 있다.

대학교 행정실에 알아보았다. 교육청에서 요구한 성적확인서 회신 공문을 담당자가 서랍에 넣어두고 깜빡 잊었단다. 황당하다.

 1979년 4월 13일 금요일에 발령이 났다. 그래서 나의 공식 교사 시작일은 4월 13일이다. 한 달 월급이 사라졌고, 호봉 승진이 매년 3월 기준이라 호봉도 1년 치가 사라졌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얼 해야 할 줄도 몰랐다.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있던 푸르게 젊은 시절이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초심을 잃지 말아야     

 처음 선생이 되었을 때는 학교에 교사 식당도 구비되지 않았었다. 선생들은 중국집에 짜장면이나 우동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다녔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을 먹는데, 어느 선생님이 지나가는 학생을 불러 마실 물을 좀 떠다 달라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 먹을 물을 왜 학생에게 부탁하나, 자기가 가서 떠 오면 되지’ 하는 생각은 속으로 삼켰으나 그 상황이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아 잊혀지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나자, 선생이 그런 사소한 개인적인 부탁을 학생에게 하여도 처음처럼 그렇게 놀라지도 않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희미해졌다. ‘이래서 잘못된 관행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계속되는가 보다’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과 만나고 가르치고 하던 3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생각을 줄곧 하였다. 처음에 내가 느낀 감정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행동을 항상 되새겨보곤 하였다. ‘내가 혹시 지금 부당하고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저 일을 떠올려 비교해 보곤 하였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이럴 때도 필요한 듯하다.     

      

 5. 승주의 조언     

 우리 나이로 23살에 교사가 되었다. 어렸을 때 ‘키가 크다’고 아버지가 남들보다 1년 먼저 학교에 보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는가 보다. 

 아주 젊은 데다가 젊은 만큼 생각도 자유로우니 복장도 좀 자유롭게 하고 다녔다. 정장을 갖춰 입고 등교할 때도 있지만, 청바지나 빨간 티셔츠, 원피스도 종종 입었다.     

 

 어느 날, 내가 수업을 맡은 1학년 어느 반의 반장이 내게 이런다.

- 선생님, 선생님은 고등학교 3학년인 우리 누나보다도 더 어려 보여요. 너무 어려 보여서 학생들에게 권위가 서지 않을 것 같아요. 복장이라도 정장을 하시면 낫지 않을까요?     

 귀여웠다. 그리고 참 대견하였다. 실제로 내가 권위를 잃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겨우 중학교 1학년 조그마한 꼬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선생님을 도우려 한다는 사실이 기특해서 ‘그러마’고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남은 30여 년의 세월 대부분 정장을 하고 학교에 갔다. 나중에는 정장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자켓 양쪽에 주머니도 있어 가끔 분필도 넣고, 메모지도 넣고 하면서.     

          

 6. 우리 반 종언이     

 오늘 일어난 일을 두고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1년에 4번 형성평가를 치른다.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보니 우리 반이 2학년 17개 반 중에 16등이다. 

 어차피 시험을 치르고 나면 꼴찌반이 있기 마련이고, 그 순위라는 것이 참 애매해서 성적이 좋은 학생이 하나만 전학을 와도 바뀌고, 만약에 우리 반에서 꼴찌였던 학생이 전출을 가도 순위가 바뀌는 것이니, 일희일비할 일이 아닌데, 그게 참 묘하다. 자기 반이 꼴찌라는 것을 알면 담임은 왠지 기가 좀 죽는다. ‘자신이 뭔가 잘못 지도해서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자책도 든다. 나도 늘 그런 마음에 시달렸다. 그래서 ‘꼴찌만 하지 말아라.’ 하는 마음이었다.

 ‘16등이니 좋구나.’ 해야 하는가. 일단 한숨은 돌렸지만, 다음 시험에는 꼴찌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별다른 대책도 없고 시간이 흘러 1학기가 끝나가며 기말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우리 반이 3등이라고 하지 않는가. 너무 놀라서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 어째 너희들 이렇게 시험을 잘 보았니?

- 종언이가요. 시험 성적 안 올리면 우리들 ‘죽는다’ 했어요. 그래서 죽어라 했어요.     

 종언이는 우리 반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도 한두 살 더 많아서인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늘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다. 아이들 말에 의하면 지역 조폭과 관련된 새끼조폭이라 건드릴 수 없는 아이라고 한다. 학교에 와서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바깥에서 무슨 일에 연루되었다고 연락이 온 적도 없는 아이이니, 다만 소문일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 그 아이 뒷조사를 해 본 것도 아니고. 아이들은 그 아이가 무서워 죽어라 공부했다고 한다. 담임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할 때보다도 말을 잘 듣는다.     

 참 어째야 할지 할 말을 잃었다. 젊은 담임을 좀 돕겠다고 종언이가 그랬나 본데, 잘했다고 칭찬할 수도 없고, 무작정 나무랄 수도 없고.   

                                                    

 7. 연극 공연

 2학년 우리 반 아이들과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에 연극 공연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마도 3학년 때일 것이다. 한 학년 총 8개 학급이 있었는데 학급별로 연극의 주제를 정하여, 충분히 준비한 후 연극발표회를 열었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5〜6개와 다른 작품 2〜3개가 무대에 올랐다. 우리 반은 『베니스의 상인』을 하기로 하고 반 친구들 모두가 무언가 하나씩 담당을 하였다. 배우가 되거나, 연출을 맡거나 조명, 무대의상, 음악 등. 나는 긴 내용을 줄여 각색하는 작업을 맡았다. 감히 각색이라 말하기에는 서툴고 어려운 작업이긴 하지만 아무튼 내용을 줄이는 일을 맡았었다. 그때 다른 반에서 주인공 ‘맥베드’ 역할을 맡았던 친구는 나중에 성우가 되었다. 그 친구가 주연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추억이 참 좋았기에 그 『베니스의 상인』을 우리 반 아이들과 무대에 올려보고 싶었다. 아이들도 좋아하여 1학기 내내 학생들과 준비를 하였다. 아이들 대부분 형편이 어려우니,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진행해 보기로 했다. 의상의 경우 재판관은 반 아이의 누나 교복인 감청색 플레어스커트를 목에 망토처럼 둘러 법관의 분위기를 냈고, 안토니오의 옷은 아버지의 크고 헐렁한 흰 셔츠의 팔목 윗부분을 고무줄로 묶고 부풀려서 시대적 배경에 어울리는 느낌을 살렸다.

 방학식을 하는 날 우리는 수박 몇 덩이를 사 놓고,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을 초빙하고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하였다. 선생님 10여 분과 우리 반 아이들이 관객이고 배우인 소박한 발표회였지만 아이들은 매우 즐거워하였고, 나도 기쁘고 행복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그 아이들이 마침내 졸업을 하게 되었을 때, 한 아이가 내게로 와서, ‘3년간의 중학교 생활 중 연극을 한 것이 가장 좋았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는 그 일을 하지 못하고 교사 일을 마감하였다. 힘에 부치고, 할 일이 이것저것 많다 보니 다시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못내 아쉬운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