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고 나약한 것에만 쏟아낼 수 있던 부족한 당신에게 쓰는 편지
*본 글은 ep-1, #1. '시작은 미약했던 나의 대응력이 싹트던 시기'에 이은 글입니다.
푸릇푸릇 봄빛이 올라오고 학교 안팎은 봄을 맞아 대청소를 했고 반장과 부반장을 뽑았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남자반장과 여자 부반장이 있었고, 나는 여자 부반장이었다. 한 번도 반장을, 회장을 하지 못했다. 그건 늘 남자의 몫이었다. 그리고 학교 임원에게는 늘 미션이 있었으니 초록 잎이 길게 늘어지는 군자란이나 분홍색 꽃봉오리를 머금은 예쁜 철쭉 화분, 벽에 걸 큰 시계 등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엄마가 직접 들고 와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와 같이 건네져야 했다.
나는 일단 그걸 들고 올 엄마가 없었다. 나는 애당초 엄마에게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는 게 뻔했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군자란 화분이 없었다. 어디에서 사야하는 지도 몰랐고, 그게 얼마인지도 몰랐으며, 무엇보다 사달라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는 언니 집에 있는 시계를 들고 오면 되겠다 생각해서 시계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미 시계는 가져올 당번이 있었고 그는 착실히 시계를 가져왔으므로 나는 그놈의 화분을 챙겨 와야 했다. 나는 옆집 장미꽃이라도 뿌리를 뽑아 가져와볼까 생각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당 있는 시골집에서 굳이 땅을 놔두고 화분에 꽃을 키우는 집이 없었기 때문에 그도 포기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명령을 어기고, 또 어기고, 급기야는 장학사가 온다는 마지막 날까지 그가 시킨 어떤 미션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싫어하는 커트머리 까만 얼굴의 깡마른 못생긴 여자애인데다가 늘 말대꾸를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그가 싫어하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근데 그 조건이 하나 추가됐을 때는?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있어 보이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화분 자리가 비어있는 게 싫었다. 자기 말을 묵살하는 게 싫었을 것이며, 어린 아이가 감히 자기 말에 토를 다는 걸, 그걸 모든 아이들이 지켜본다는 걸 견디기 힘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꾸지람인지 잊었지만, 시작은 그 화분이었다. 아니 2주일간 꼭 가져와야한다는, 때로는 명령이었고 때로는 당부였고 때로는 사정이었던 그 말에 내가 ‘네!’ 철석같이 대답해놓고는 가져오지 못한데 있겠다. 나도, 없다는 말을, 못 가져온다는 말을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가뜩이나 거친 입에 더 거친 말을 장착하고 까만 얼굴에 한 마디도 지지 않겠다며 결연히 서있는 꼬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네, 죄송합니다.’ 하면 될 일을 끝까지 말대꾸하고. 누가 너한테 그렇게 가르치디?”
종결어미 등은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말이었다. 30년이 훌쩍 지나도 나는 ‘버르장머리 없이, 사과 없이, 말대꾸’와 같은 단어들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가장 화가 난 말은 그 다음이었다. “누가 너한테 그렇게 가르치디?” 그 말은 말 끝에 엄마, 아빠가 분명히 자리한 말이었다.
창밖으로 넘어오는 햇볕은 따뜻했고, 아이들은 내 편이었거나 아무 편도 없었다.
‘절대 울지 말아야지 없어 보이니까.’ 나는 울지 않고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그가 굳이 듣고 싶다는데, 그렇게까지 듣고 싶다는데 못 해줄 말은 아니었겠다. 그 다음에 나는 무슨 말을 했나?! 기억에 없다. 그냥 그렇게만 기억된다. 고개숙이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기어들어가듯 말하던 “죄송합니다.” 그렇게 2년간 나는 그의 학생이었다. 1학년에 1개 반밖에 없는, 선생님도 적은 그 학교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이 그의 학생이었고, 그와는 그 다음부터는 별다른 사건 없이 지냈다. 나는 그와 부딪칠 일을 만들지 않았고, 그도 나를 따로 혼내는 일이 없었다. 나는 전주의 아이들이라면 꼴지라도 풀 시험지였다고 해도 우리학교에서는 좋은 점수로 좋은 등수를 기록했고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갔고 백일장 대회에도 나갔으며 상도 타왔다.
다만, 그는 내가 다음 해에 부회장이 되었을 때에도 내게 무엇을 가져오라거나 엄마를 모셔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당연히 내가 교실에 뭘 가져와야된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궁금한 건, 그건 거절할 수 있었던 일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많은 아이들은 거절하지 못했고, 나는 거절한 게 아니라 그 명령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들키기 싫어서 끝까지 가져올 것처럼 “네, 네” 대답했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마감 날을 지키지 못해 집안 물건 곳곳에 붙이는 빨간 딱지를 내 자신에게 붙였다.
그 빨간 딱지는 나 뿐 아니라 내 친구들에게도 자주 붙었다. 그가 내게 한 말은 나한테만 뱉은 특별히 나쁜 말이 아니라 자신의 학생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선생님의 특권 같은 말이었다.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 손톱이 까맣도록 흙바닥에서 놀거나 손 등에 튼 살이 두텁게 내려앉은 아이들, 욕을 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강함을 자랑했던 아이들, 모두 그에게 그와 같은 말들을 들었다.
누구나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을 수 있고, 우리 때 흔한 풍경이기도 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학교란 그런 곳이었다. 우리 학교의 그 넓은 마당, 그 마당을 뛰어다니며 했던 7발 뛰기나 오징어 놀이, 때리고 도망가는 남자아이들과 몇 바퀴씩 돌았던 잡기놀이, 학교 옆 개나리 밭에 친구들과 만들었던 아지트보다는 그 날이 먼저 떠올랐다.
그날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저만 혼내세요. 버릇없다느니, 가르쳤다느니 그런 말로 엄마 끌어오지 말고, 저만 혼내세요.” 나는 딱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는 잘못한 만큼만 혼나고, 그도 잘못한 만큼만 혼내고, 그 화가 어딜 넘어가지 않고 그 원 안에서만 사그라지길. 다른 사람에게 불똥 튀지 않는 딱 그만큼만을 원했다.
당시에 나는 무척 말을 잘 하는 아이였다. 똑똑한 척 보이는 최고는 좋은 등수를 유지하는 거였지만, 가장 쉽게는 말을 잘하는 거였다. 그게 말이 되는 말이든, 아니든 일단 내가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을 내게만 주면 됐다. 지금은 내 말을 들어온 많은 어른들이 또는 언니와 오빠들이, ‘그래, 그래. 너 이긴 걸로 해라.’의 마음으로, 넘겼을 거라는 걸 안다. 그땐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고, 난 내가 이겼으면 됐다며 득의양양 돌아서서 내가 뱉었을 말도 안 되는 말들이나 논리를 가장한 생떼를 잊었다.
나는 그에게 혼나는 순간, 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해주고 싶었던 많은 말들이 있었다. 잘할 자신도 있었다. 논리를 가장한 생떼를 부릴 수도 있었고 울면서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그 ‘버릇없다’는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를 그에게 내가 가진 어휘를 총 동원해서 설명할 수도 있었다. 왜냐면 나는 그가 나를 비롯해 우리들에게 그 말을 내 뱉을 때마다 속으로 몇 번씩 그 말의 나쁨에 대해서 생각했으니까. 나는 생각해두고 있던 말을 뱉어도 되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왜냐면, 정말 버릇없어 보일까봐. 그래서 정말로 우리 엄마가 날 잘못 키웠다고 선생님이 생각하게 될까봐. 나는 이 정도 선은 지킬 줄 아는, 우리 엄마가 잘 키운, 스스로 잘 자란 그런 아이에요, 라는 말을 그 “죄송합니다.”라는 사과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내 머릴 어지럽히는 것을 보면, 불쑥 불쑥 그날이 떠오르는 걸 보면, 또 그날로 돌아가 다시 그 상황이 되어, 지금의 내 나이로 1989년도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그날을 맞아 봐도 난 죄송하지 않다. 전혀. 죄송하지 않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학급에 입원이 되었으면 학교에 당연히 기여해야 한다는, 그 기여는 물질적인 기여도 당연히 표함하고 있다는 그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
난을 못 갖고 군자란을 난처럼 키웠던 어느 없는 양반네처럼.
선생님도 나와 같이 빈틈을 채우고 싶어 아등바등 했을 거란 걸 알아요.
아무리 가진 척을 해도 몰라주는 아이들이 미웠을 거라고도 생각해요. 저도 그랬어요. 한겨울 하드를 먹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백화점을 가서 분홍색 투피스도 샀는데, 아이들은 도통 부러워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무척 얄밉더라고요.
아빠가 없는 자리의 빈틈을 채워주려고 애쓴 사람은 많아도, 아빠가 없는 아이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저 스스로 그 손가락을 만들고, 보고, 세상에 화를 키우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나를 봤지, 내 등 뒤의 아빠와 엄마를 보지 않았는데, 나는 나를 키워 그 자리를 가리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말들을 더 상처 깊게 들었던 건 정말 저에게 부재한 것을 꼬집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레 더 찔려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요.
아마 선생님은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것 같아요. 마흔 둘 셋쯤, 우린 아직 어리잖아요. 실수하는 나이죠. 잘못도 잘 지르고요. 작고 나약한 것에, 나에게 해코지 않는 것들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있는 나이죠. 그래도 우리는 스스로 잘못을 알 수 있는 나이에요. 보기 어려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직시하고 반성할 수도 있어야 하죠.
그래서 말씀드려요. 그리고 이젠 진정한 어른이 되어서 아마 30년을 넘었을 교직생활 중에 나를 비롯해 숱한 학생들에게 말로 준 상처들과 남자아이들에게는 더 매섭게 때리며 실제 몸에 새겨졌을 상처에 대해서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었던 당신은 비윤리적이에요. 욕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서슴없이 욕을 뱉어대다니, 당신은 어른스러운 언어를 갖지 못했어요. 가진 것을 기준으로, 배움을 기준으로, 집의 평수를 기준으로, 집에 있는 물건의 가짓수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다니, 그렇게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을 대하다니 정말 교사로서 자격이 없어요. 무엇보다 당신 때문에 오랫동안 스스로를 탓해 온 저와 같은 아이들이 많았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용서하기 어렵군요.
아이의 부모가 되고 보니, 당신의 그 나이가 되어보니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겠어요. 어려워요. 그래도 내가 모르는 시간들 속에서는 당신이 조금은 변화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말에 상처받은 사람이 내가 마지막이었길 바라지만, 사실 난 당신과 2년을 보냈기 때문에 아닌 걸 알죠. 그나마 빌 수 있는 건, 우리학교가 마지막이었길 정도네요. 꼭 시간들을 반성했으면 해요. 꼭 시간들을 부끄러워했으면 해요. 그래서 교사였던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운 기억이 아니길 바라요.
당신의 학생으로서, 충심을 담아 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