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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산책 시키기

by 올레비엔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풀, 벌레, 심지어 흙도 무서웠다. 풀숲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신발에 흙이 묻는 것도 싫었다. 예쁜 구두라도 신으면 흙바닥에서는 구두굽이 걸음걸음 땅에 박혀서 걸어 다니는 못이 되는 기분이었다. 제주 바다도 좋고, 조용한 시골 마을도 좋았지만, 왜 좋은지 모르는 것을 몰랐다.


강아지 산책시키기

개가 성장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그렇듯이 사람의 일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게다가 개는 자고 일어나면 어른이 되어 있다. 개를 처음 키우는 사람이, 그것도 대형견을 키우는 사람은 어릴 때를 놓치면 앞으로 평생 고생하게 된다. 어릴 때 교육을 잘해두어야 하고, 힘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규칙을 알려줘야 앞으로가 편해진다. 우리 마루는 결국 노년의 엄마가 혼자 키워야 하기 때문에 더욱더 열심히 훈련했고, 산책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4개월이 넘어부터는 강아지의 힘이 버거워지게 돼서 항상 목장갑을 끼고 나가야 했다. 줄을 당기면 손이 쓸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어디서 튀어 나가서 어떤 수풀로 들어갈지, 무엇을 주워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목장갑은 힘쓰기도 좋고, 더러운 것을 떼내기도 편하고, 간식을 잔뜩 주머니에 넣고 줄 때 마루의 침도 막아주었다. 매일 밤 공부한 강아지 훈련법을 실습도 하고 돌아왔다. 산책 초반에는 항상 전투적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갔다. 그 무렵 어떤 외투 주머니에도 개 간식과 목장갑 한쌍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훈련 목적으로 개를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지만, 산책은 곧 우리 일상이 되었다. 개랑 한 시간쯤 산책을 하다 보면 저절로 길에 주저앉게 된다. 힘이 들어서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있으면 마루는 친히 뛰어와서 우리를 눕혀준다. 젤로는 참지 않고 마구 짖으면서 마루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우리가 산책하는 길은 건천을 따라서 난 작은 길이었다. (제주도에는 항상 물이 흐르는 강이 별로 없다. 비가 많이 오면 갑자기 물이 흐르는 하천이었다가, 바다로 물이 다 쓸려내려가고 나면 다시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다. 그래서 건천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자주 다니던 건천은 개중에 큰 편이라서 안쪽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여름 산책은 언제나 마루의 수영으로 마무리 됐다. 강아지는 혼자 수영하지 않는다. 주인이 주위에서 뭐라도 던져줘야 하는데, 처음에는 공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왔다가 나중에는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 같은 것을 주워서 던져줬다. 때문에 산책이 수월해진 뒤에도 언제나 목장갑 신세였다.

하루에 두 번씩 나가도 마루는 항상 산책을 좋아했다. 산책에서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가 있으면 집까지 주워오기도 하고, 수영도 했다. 사람하나 만나지 못하는 한적한 산책길을 매일 똑같이 다녀도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동네에 육지에서 이사 온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가 십 몇년만에 동네에 이사 온 첫 외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처음에는 선크림을 짙게 바르고, 모자를 쓰고 산뜻한 차림으로 나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흙 묻은 신발, 구멍 난 티셔츠, 그을린 피부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갔다.


사람 산책 시키기

더 좋은 산책로를 찾기 위해서 마을 지도를 놓고 마을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마을 안길돌담 사이의 올레길을 걸으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하고, 마을을 탐험했다. (올레길은 원래 바람이 들이치기 어렵도록 마을 안 길을 좁은 돌담길로 만들어 놓을 것을 말한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산신당도 있었고, 우리동네 사람만 아는 오름도 있고, 물을 가둬두는 못도 있었다. 어디에 가야 대나무 숲이 있고, 동백길은 어디고, 어디가 이장님네고, 어디가 미역을 나눠주신 해녀 할망네 집인지 구석구석 훤히 알게 됐다. 시골 동네는 돌아볼수록 볼거리가 있고, 얼핏 들여다 보기만해도 집집마다 각기 다른 취향이 한눈에 보여서, 산책길도 여행이 된다.

심지어 야밤에도 여자 혼자 가기 무선운 곳을 마루를 방패 삼아 산책하러 갔다. 야밤에 강아지를 차에 태우고, 바닷가도 가고, 수확이 끝난 밭에도 들어가고, 오름에도 가고, 사람 하나 없고 불빛 하나 없는 곳을 헤매고 다녔다. 혼자라면 절대 갈 수 없었을 곳, 어둠 속에 바람과 우리들만 있었던 그때, 가득 빛나는 별을 구경할 새도 주지 않고 우리 강아지들은 날뛰었다.

시골살이가 처음이라면 개를 키우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마루가 없었다면 동네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을 것이고, 동네를 훤히 손바닥처럼 정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강아지들을 산책시켜 준다고 생각했는데, 개들이 우리에게 동네를 소개해줬다. 아직도 산책길에 발견한 길에서 달래를 캐고, 동백 씨를 줍는다.

마루와 젤로가 없어보니 알겠다. 이제 대문을 나와서 차 문을 여는 짧은 길 외에는 동네 산책을 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끄는대로
낯선곳으로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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