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점심을 먹고 일찍 도서관에 도착했다. 책 쓰기 수업 전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싶어서 일찍 나온다고 서둘렀는데도. 4시가 넘어있었다. 세미나실은 불이 꺼진 채로 열려 있었다. 열람실에서 한동안 여러 책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세미나실로 돌아왔는데, 누군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 사람이 안 보이는 척 반대편에 떨어져 앉아서, 나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뭘 쓰지? 뭘 어떻게 써야 대박이 날까?
일단 책을 완성하면, 아는 동물 병원 원장님들한테다 뿌리고, 보도 자료도 내고, 방송이나 유튜브에 나가야 그나마 좀 소문이 날 텐데, 누구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하~ 도움이 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훈련소나 협회에도 책을 다 보내려면 몇 권이나 인쇄해야 하나? 표지가 좀 괜찮아야 하는데 싸게 부탁할 사람이 누구더라?
100만 원이면 다 되려나? 여기서 쓰면 비용이 덜 들어야 할 텐데... 그나저나 뭘 쓰지?
맞다! 교수님이 번역하다 그만둔 책! 그 책 좋던데, 교수님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책이라 안타깝다고 하셨는데 딱이네! 그 책 내용을 대충 바꿔서 써야겠다. 책 쓰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쉽네, 난 천잰가 봐.’
다른 사람들은 무슨 내용을 쓸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서 듣지 않으려고 해도 조용한 도서관에서 어찌나 크고 당당하게 남의 책을 베껴 쓸 궁리를 하는지 생각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애견 관련 책을 쓸 모양인데, 책 쓰는 일이 나보다도 더 절박해 보였다. 애초에 글을 쓰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책을 써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쓰지도 않은 책을 대박 내려는 계획을 세우느라 어찌나 시끄럽게 생각하는지, 그 여자의 생각에 대답하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2번째 수업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책 쓰기 시간이 되었다. 한미숙 작가는 이번에도 혼자서만 조급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강의가 끝난 뒤에는 수강생들이 각자 확정된 책의 주제와 장르, 분량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목차 완성하셨으니까 이번에 쓰실 책 장르와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첫 책을 쓸 때는 내용을 많이 이야기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이든 글이든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면서 아이디어도 얻고 생각도 보완할 수 있고요.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많이 광고하셔야 합니다. 얄미운 친구들한테도 많이 이야기 해두세요. 그러면 지인들이 책에 대한 의견을 주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감시자가 되어 줍니다. 친구들 보기 부끄러워서라도 책 완성하게 되니까요. 90일 동안은 애인처럼 자나 깨나 책 생각만 하고 사셔야 합니다.
그럼 앞에 앉아계신 분부터, 어떤 주와 장르의 책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한 분씩 이야기해 볼게요.”
아까 일찍 와있었던 여자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 쓰기 수업을 듣는 사람 중에 어린 편이었는데, 평범하다 못해 수수한 얼굴에 비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차림이었다. 마음속으로 초조함, 근거 없는 자신감을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럽게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으로 봐서, 생각보다는 나이가 어리고, 야망이 큰 사람인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취미로 하는 책 쓰기 수업에 참여하면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찾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사랑입니다. 한국 반려견 문화 교육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첫 책은 아니에요. 공저로 낸 책이 있기는 한데 이번 기회에 저만의 노하우를 담은 동물 행동 교정과 반려견 문화에 대한 책을 쓰려고 해요
애견 훈련소에서 오래 일하기도 했고, 책을 쓰면, 반려견 문화를 선진적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은 여자분들이 더 많은데, 여자 훈련사들은 많지 않아서 잘만 쓰면 대박 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을 시작으로 꼭 유명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욕망을 드러내며 마음으로 말했다.
“오 그러네요. 여자 수의사님은 많은데, 훈련사님은 많이 못 본 것 같아요. 책의 놀라운 힘이 뭐냐면요. 광고를 못 해도 아무리 작은 출판사에서 나와도 결국 좋은 책은 오랫동안 살아남게 되거든요. 저희처럼 도서관에 모여서 쓰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책도, 좋은 콘텐츠라면 충분히 대박 날 수 있습니다. 꿈이 크셔서 좋네요 ㅎㅎ 좋습니다. 강사랑 님은 실용서를 쓰실 계획이군요. 그럼 다음 분 말씀해주세요.”
다음 사람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첫 수업시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앞에 걸어가던 부부의 남편이었다. 오늘은 혼자 와 있었다.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남자다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스러운 소망을 꺼내 놓았다.
“안녕하세요. 이명수입니다. 저는 아내와 딸을 위한 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보는 아름다운 세상을 딸과 아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하기 어려워서 조금 얇은 책이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삽화가 없는 글로만 된 동화를 말씀하시는 거죠”
“맞습니다.”
“당연히 가능하죠. 글은 작가가 보는 세상을 그리는 도구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힘을 가졌어요. 우리가 머릿속에 있는 환상적인 풍경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글입니다. 그래서 글을 생각이나 마음 감정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다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분량이나 컴퓨터 이용에 대한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천히 배우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가족들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글로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 가능한가요?’
단단하고, 결의에 찬 것처럼 그 남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마음으로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순자예요.”
이순자는 60대 중반의 여자분이었는데, 밭일로 햇빛에 적당히 그을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가 마트나 가까운 곳은 팔 토시도 뺄 새 없이,장화를 신고 트럭을 운전해서 다니는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누가 누군지도 구별되지 않는 익숙한 아주머니였다. 그나마 글쓰기 수업에 온다고 교회 갈 때나 신던 구두에 블라우스를 챙겨 입고 온 것 같았다.
밭에 키우던 작물에 친절과 사랑을 다 줘버린 사람처럼, 친절하지도 사교적이지도 않은 말투로 건조하게 투덜거렸다.
“사실 목차를 쓰긴 썼는데 그런 이야기를 써도 될지 모르겠어요.
책을 쓰고는 싶었는데, 쓸만한 이야기도 없고, 소설이나 시를 쓸 재주도 없고, 살아온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살아온 이야기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목차를 정리하면서 보니 분량도 적을 것 같고,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쓸 수 있을지, 써도 될지 걱정만 돼요.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다 쓰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빼고 나면 별 쓸만한 거리도 없어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쓰실 건데요”
한미숙이 물었다.
“우리 아이 낳던 이야기도 쓰고, 시집살이도 쓰고, 남편 이야기도 쓰고요. 그런데 어떻게 정리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좋네요.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 좋습니다. 우리 삶은 매우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똑같죠. 공감할 수 있는 독자층이 가장 넓다는 뜻이기도 해요. 보통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는 어쩌면 누구나 겪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이야기이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겠어요? 저희가 이렇게 모여서 책을 쓰는 이유가 그런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니까요. 다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지만 계획하시면 될 것 같아요.
다음 시간에 좀 일찍 오셔서 저랑 책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죠.”
한미숙 작가는 그동안 난생처음 강의를 하는 사람처럼 경직되어 있다가 사교적이지 못하고 툴툴거리는 듯한 이순자 아주머니의 말에 비로소 미소를 띠면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진심으로 보통사람의 이야기가 삶에 의미 있는 파문을 만들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인 것 같았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에세이를 쓰고 싶어 했고, 실용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차례가 지나고 나도 간단하게 소개를 마쳤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없어서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은 구상 중이라는 말로 관심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일어서서 소란스러운 순간에, 강사님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중요한 것을 잊었네요. 완성하신 목차 꼭 프린트해서 들고 다니셔야 합니다. 프린트해서 메모도 하시고, 수정도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꼭 글도 쓰셔야 합니다 이제 진짜 가셔도 됩니다.”
다들 조용히 듣고, 수업이 끝나면 어색하게 헤어지던 사람들이
이 다급한 숙제 덕분에, 드디어 소리를 내어
“네”, “알겠습니다.”, “프린트할게요.”, “감사합니다.”
제각각 대답하면서 순간 강의실이 활기를 띠었다. 자신의 책을 쓰러 온 사람들이 같이 쓰는 동료가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