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끝나고, 밤길을 30분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 되었다. 가장 편안한 세계였으나, 어느덧 족쇄처럼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린 집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진 나를 꺼내 준 것은 글이었다. 강의 앞뒤로 걷는 시간은 책을 쓰는 일보다도 더 소중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들이 도서관을 빠르게 빠져나간 뒤, 어색하게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아닌 사람들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도서관 입구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다. 뒤쪽에서 누군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혹시 10년 전쯤에 서울에서 일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내내 눈에 띈 강사랑 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일하기는 했습니다만,”
“전에 뵌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여쭤봤는데, 혹시 아너 그룹에서 일하신 적 있으신가요?”
“아, 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세상은 좁다.
“강아지용 공기청정기 광고할 때 뵌 분이랑 너무 닮아서요. 제가 그때 훈련사님 따라서, 모델 강아지 데리고 촬영 갔었거든요.”
“아, 네......”
대답도, 거짓말도 하기 싫어서 주춤거리자 강사랑이 알아채 버렸다.
“아, 맞죠? 맞구나. 그분! 설마 그때 그분인가 싶었는데 맞구나!
설마 싶었는데, 톰브라운 신발을 신고 계셔서 그분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때 저는 심부름 하러 따라간 거라 혼자 도시락도 없어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잠깐 현장 둘러보시더니 도시락 모자란다고 챙겨주셔서 서러울 뻔할 때 구해주셨었어요.”
솔직히 기억은 안 났다. 마음을 듣는다는 것은 말 못 하는 작은 문제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해서, 곧잘 현장의 문제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었다.
“기억 안 나시겠지만, 나중에 들으니까 아너 그룹 본사에서 나오신 분인데, 현장까지 챙기신다고 친절하고 잘생겼다고 다른 언니들이 다 칭찬하더라고요. 사실 잘 생기셔서 기억났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신기하다. 근처 사시나요? 걸어가시네요?”
“네. 집이 멀지 않아서요.”
“저는 차를 두고 와서 오늘은 시내까지만 걸어가서 택시 타고 가려고요. 전에 뵀을 때는 활달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조용하신 분이시네요. 제가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니죠?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워서요.”
“아닙니다. 그때는 일이었으니까요.”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지금은 왜 이런 시골에 와 있는 거지?’
‘성공할 만큼 한사람이 이런 동네 책 쓰기 수업은 왜 듣는 거지?’
‘몇 살일까?’
속으로 내 신상에 관한 질문을 끝도 없이 던져댔다. 다행히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들이라서, 생각에 대답할 염려는 없었다.
“소설 쓰신다고 하셨죠? 글도 잘 쓰시나 보다. 근데 왜 갑자기 책 쓰실 생각을 하신 거에요?”
“어쩌다 보니 쓰고 싶어져서요.”
이 대답은 진실이었다. 그날 밤, 인스타그램 광고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이유로 홀린 듯이 신청했으니까. 아직도 왜 책을 쓰고 싶은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저는 이번에 책을 써서 제가 운영하는 센터도 홍보하고 하려고요. 공저지만 책을 써본 적이 있어서, 계획은 대충 다 세웠어요. 쓰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외국책을 베끼려던 계획을 다 들었는데, 거리낌 없이 글 쓸 계획을 다 세운 것처럼 자랑하기까지 하다가 명함을 건네받고 겨우 강 사랑과 헤어졌다.
10분 정도 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걷는 동안 몇 년 동안이나 신었던 신발이 남의 신발을 빌려 신은 듯이 온 신경이 발에 쏠렸다. 낯설게 간지러운 느낌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걷는 방법도 잃어버리고, 어색하게 양철 로봇처럼 뚝딱거리면서 땅만 보면서 돌아왔다. ‘이 신발이 톰브라운이었군,’
신고 나갈 일이 없어진 명품 구두, 평소에 신고 다니는 운동화 옆에 오늘 신고 갔던 톰 브라운 스니커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들어왔다.지금에와서는 오히려 쓸데없이 깨끗한 신축 빌라와 톰브라운 같은 과거의 취향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하고 있었다.
몇 번의 이직과 사업에 실패하고 일용직까지 거치다가, 운좋게 구한 작은 회사로 이직하면서 작은 성산시로 왔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 가고 있었다. 사업이 실패하고, 재정 문제가 생기고, 일상적인 생활도, 자존감도 다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생각을 하던 때였다. 급하게 이사 오느라 이 집 딱 한군데만 보고 계약을 했다. 집을 보러오던 날 몇 군데를 더 보러 가기로 했지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씨 덕분에 겨우 이 집만 둘러보고 돌아가야 했다.
그날은 비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차 안에 있어도, 자동차 지붕에 떨어지는 거센 빗소리 때문에 대화하기 힘들었다. 보통 부동산 사무실에 가서 집을 볼 때는 더 집중을 해서 공인중개사님의 속마음을 듣는다. 혹시 문제가 있는 집은 아닌지, 말해주지 않는 것은 없는지를 확인하는데, 그날은 비바람 소리때문에 실제 소리 내서 하는 말도, 마음의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비바람을 헤치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거실에 있는 큰 창문으로는 비 때문에 깜깜해진 시내가 빗물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비에 젖어 온통 찝찝한 순간에 느껴지던 차갑고 건조한 대리석 바닥의 개운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비 오는 거리처럼 짙은 회색의 소파와 주방이 내 취향과 딱 맞았다. 거실 벽면을 기역자 모양으로 가득 채운 큰 창에는 빗물이 거세게 부딪히고 있었다. 창이 커서 아직도 비 오는 거리에 서 있는 느낌을 주었다. 비바람 한가운데에서도 젖지 않는 듯한 묘한 안도감을 주는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고, 아무도 살았던 적이 없는 새집인 점도 좋았다.
“등기부도 깨끗한 집이고, 지방이라 가구랑 가전까지 풀옵션으로 나왔습니다. 이 집은 정말 몸만 들어오시면 됩니다. 지방이라도 이렇게 다 갖춘 집은 없어요. 전세가가 좀 높은 것 같으면 매매하셔도 되고요. 그런데 몇 년만 사실 거면, 전세가 좋기는 하죠. 관리비도 싸고…….”
공인중개사는 관리비며, 위치를 열심히 설명하다가, 내가 생각에 빠져서 듣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서 생각했다.
‘날씨도 안 좋은데 빨리 계약하고 가면 좋겠네, 이 근처에서 제일 비싸서 계약이 수월하게 된 적이 없는데…….’
이 생각을 듣자 더 이곳에 살고 싶었다. 그 동네에서 비싼 신축이라는 말이 경쟁심을 부추겼는지, 묘한 느낌 때문에 끌렸는지는 모르겠다. 역시나 남은 돈으로는 집을 계약하기에 조금 비쌌다. 전세금과 매매가가 거의 차이나지 않아서, 구매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시골이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라서 전세로 살기로 했다. 그래도 전 재산을 무리하게 끌어모아 전세금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내 돈이 바닥났을 때에서야 나를 위해 남은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다는 것에서도 묘한 쾌감이 있었다. 결국 6개월을 겨우 채우고 다시 마음의 소리가 커져서 마지막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조차, 갈데없이 집에서만 머물 수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될 지경으로 마음에 꼭 드는 집이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의 장점은 이런 계약에서 빛을 발하는데, 속임수를 잘 분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망설일 것 없이 태풍처럼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가서, 당일로 계약을 마쳤다. 이 집 덕분에 순조롭게 이사를 오고 새로운 직장, 새로운 장소에서 새 삶을 시작했지만, 결국 마음의 소리가 너무 커지는 증상은 반복되었고, 이번 회사에서도 사람들 마음을 듣고 하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다가 반년 만에 다시 실직하게 되었다. 실패만 남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떠나려고 계획했지만, 이 집은 나를 붙잡고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집은 결국 족쇄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 집을 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꼭 집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같은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