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나를 만든 날들
인생의 63층에 서서 숨을 고른다. 아래로 펼쳐진 세상은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삶의 지도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지난날의 속삭임을 전한다.
63층. 한 계단씩 밟아 올라 마침내 이곳에 이른다. 첫 발자국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모여 모자이크로 현재를 완성한다. 시간의 결들이 겹겹이 쌓이며 하나의 풍경화를 이루고, 그 안에 삶만의 색채와 선들이 어우러진다.
어린 시절의 계단은 맨발로 뛰어다니던 자유였다. 마을 냇가에서 진흙 냄새를 들이마시며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뛰놀았다. 개울물 속 물고기를 쫓고 다리에 붙은 거머리 수로 내기를 하며 웃음꽃 피우던 시간. 소쿠리에 덫을 놓고 새를 잡기 위해 줄을 당기던 순간의 설렘과 가슴이 터질 듯 뛰던 떨림을 기억한다. 골목길은 우리만의 터전이었고 하늘에 닿을 듯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열여덟 번째 층은 불꽃같았다. 가슴속에 품었던 별빛 같은 꿈들과 끝없는 가능성의 문턱에서 공인회계사라는 목표를 향해 매일 새벽을 맞이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창문에 비친 눈빛은 별처럼 빛났고 형광등 아래 펼쳐진 책장은 미래로 가는 문이었다. 삶은 차갑게 현실을 가르쳤다. 두 번의 도전 끝에 간신히 대학 문을 열었고 공인회계사 시험은 잇달아 실패했다. 시험지 앞에서 무너진 자신감은 가을 나뭇잎처럼 떨어져 좌절로 남았지만, 새순이 돋아나듯 새로운 도전의 뿌리가 되었다.
이십 대 층은 사랑의 향기로 물들었다. 어느 봄날, 첫사랑이 찾아와 내 마음을 두드렸다. 별빛 내리는 바닷가에서 나눈 수줍은 속삭임은 지금도 가장 맑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의 바다는 우리의 말 없는 약속을 품은 채 끝없이 출렁였고 모래 위에 남긴 발자국은 밀물에 지워져도 마음속에선 선명했다. 함께 걷던 거리에는 발밑마다 꽃이 피는 듯했지만, 동백이 붉게 피는 계절엔 사랑도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눈물을 삼킨 가슴에 남은 빈자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픔 속에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비로소 배웠다.
삼십 대 층의 계단은 책임이란 이름의 무게였다. 가장으로서 짊어진 가족의 행복과 안정이라는 사명. 출근길 지하철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나와 같은 무게를 짊어진 듯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도 피곤함에 눈을 감았던 저녁들. 아이들의 작은 손이 손길을 찾을 때 외면했던 빈틈은 지금까지도 마음 깊은 곳에 쓰라림으로 남아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입술을 맴돌지만,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강물임을 안다.
일터라는 계단은 쉼 없는 달리기였다. 끝없이 쌓이는 업무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의지는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랐다. 형광등 아래 늦은 밤까지 남아 있는 사무실은 고독의 바다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가로등은 묵묵히 그림자를 비추는 유일한 친구였다.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해야 한다는 고집 속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은 나약함이라 여겼다. 지금 돌아보면, 짐을 나누었더라면 더 멀리,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십, 오십 층을 넘어서며 마음속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삶은 홀로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니었다. 수천 개의 실로 짜인 한 폭의 비단이었다. 함께했던 가족과 친구, 동료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품은 거울이자 따뜻한 이불이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함께 어우러져 인생이라는 뜰에 진한 무늬를 새겼다.
이젠 가끔, 새벽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빛은 어제와 오늘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불확실한 틈새에서 내일을 그려본다. 차 한 잔의 김이 피어오르듯, 삶은 매 순간 형태를 바꾸며 흘러간다.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삶의 길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있다. 어떤 것은 또렷하고 어떤 것은 희미하다. 모든 걸음이 지금을 만든 꼭 필요한 조각이었음을 깨닫는다.
63층. 눈을 지그시 감으니,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진다. 아이의 순수함, 청춘의 열정, 중년의 무게가 층층이 쌓여 지금 이 자리의 나를 이루었다. 오른 계단 하나하나에는 단순한 시간이 아닌, 마음의 울림과 추억이 켜켜이 담겨 있었다. 젊은 날엔 두세 계단을 가뿐히 뛰어오를 때도 많았다. 숨이 차도 멈추지 않았고 정상의 높이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무릎이 시큰하고 숨이 차다. 하지만 괜찮다. 느리지만 여전히 오르고 있다. 빠르기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63층에서 마주한 오늘, 내 안의 깊은 곳이 속삭인다. 인생은 꼭대기에 닿는 환희가 아니라, 오르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풍경과 길 위에서 나누는 손길의 온기라고. 마침내 깨닫는다. 내가 쌓아 올린 것은 높이가 아니라, 삶의 깊이였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었음을.
지금도 시간이라는 계단을 힘차게 밟으며 아직 써지지 않은 내일의 글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 걸음 하나하나에 지나온 모든 날이 살아 숨 쉬며 함께 전진하고 있음을 안다. 숨을 깊이 들이쉬며 다시 세상을 내려다본다. 가을 햇살이 도시의 창문마다 금빛 물결을 일으키고 바람은 지나온 시간의 향기를 품은 채 내 곁을 휘감는다.
바람이 귓가에 속삭인다. 헛된 발걸음은 없었다. 모든 넘어짐이 일어서는 힘이 되었고 모든 눈물이 웃음의 씨앗이 되었다. 모든 순간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