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한편에 쌓여가는 청첩장들을 바라보며
결혼의 준비는 달콤한 사랑에서 새로운 현실의 삶으로 넘어가는 준비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예비 신랑과 신부에게는 그 시간이 행복하기도 하지만, 이상에서 현실의 경계로 넘어설 준비를 하다 보니, 때로는 속상하고 다투는 일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서투르고, 마지막이 될 것이라 더욱 잘 하고 싶은 마음 때문 일 것이다.
결혼의 모든 준비가 끝날 즈음이면, 늘 함께 있고 싶다며 속삭였던 두 사람의 바람은 현실로 가까워지며 설레게 된다. 하지만 시작이란 것이 설렘만 있겠는가?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삶의 시작이 두렵고 막연하기도 할 것이며, 부모의 슬하를 떠나 그들도 부모가 되어야 함에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것이다.
올봄, 지인들의 결혼 소식이 담긴 여러 장의 청첩장을 받았다. 청첩장을 들고 오는 예비신부 예비신랑의 모습은 수줍거나 힘차다. 정성 가득한 손 글씨로 "OOO님께"라고 적힌 카드가 들려있는 가지런히 모아진 손이 더없이 경건해 보인다. 상대가 그러하니 건네받는 나의 손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받는 이의 마음도 이러한데, 주는 이의 마음은 어떠할까? 아마도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떨리고 긴장이 될 것이다.
청첩장 봉투 뒤에 붙여진 스티커의 모양은 다양하다. 꽃, 구름, 하트, 별, 금박, 은박. 작고 앙증스러운 스티커를 뗄 때면 행여라도 경망스러운 자국이 남을까 염려되어 나의 손길은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마음은 모두에게도 전해져 그 순간을 바라보는 이와 그 순간을 행하는 이 모두가 경건한 마음이 되어 버린다. 이렇듯 결혼은 청첩장을 주고받는 마음처럼 가슴 떨리고 설레며, 고귀하고 경건한 것이다.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 말하리.
찾아주신 고마운 마음, 늘 간직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 한용운 님의 ‘사랑’이 인용된 결혼식 초대의 글.
스티커를 떼고 살포시 펼친 하얀 카드. 깊고 높게, 빛나고 굳건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다짐의 글과, 주인공들의 이름. 그리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그들만의 기념일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그것들을 눈에 담고 나면, 한동안 나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주인공들 옆에 나란히 있는 부모님들의 이름이다. 나에겐 일절 대면식도 없는 처음 보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노심초사하며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부모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 지는 것 같아서 이다.
청첩장에 쓰여 있는 당신들의 이름은, 품을 떠나는 자식들의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처음 학교를 가던 날 낯선 교실로 향하는 아이를 바라보던 심정처럼,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는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들의 마지막 배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청첩장을 볼 때면,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과, 그런 부모의 곁을 떠나는 예비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그 어떤 감동적인 스토리보다 애틋하고 순결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청첩장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남자와 여자의 마음. 그리고 그들을 품에서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배어 있는 인생에서 단 한번 만들어지고 보내어지는 카드이다.
정리의 시작은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얼마 전 책상을 정리하며 오래된 청첩장 몇 장을 파쇄기로 정리하려 했었다. 하지만 조각조각 부서질 카드를 생각하니 와르릉 굉음을 내는 기계 근처에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차선으로 두 눈 질끈 감고 휴지통에 넣어보려고도 했으나, 쓰레기 더미 속에 묻힐 하얀 청첩장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이 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버리지 못한 청첩장 속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고결한 마음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진실한 각오, 그들의 출발을 누구보다 벅차게 축복해 주었던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내색 못하며 속내로만 허전한을 삼키던 부모님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에게 청첩장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 해도 함부로 버리기가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책상 서랍 한편에는 시간이 지난 청첩장들이 쌓여 있다. 하지만 지나간 것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하여 그것들을 곁눈질하며 야속해하거나 가볍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되려 삶이 힘들거나 마음이 나약해질 때면, 그곳에 담겨 있는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생각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주인공들처럼 내 마음도 다잡아 볼 것이다.
정성껏 청첩장을 준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했을 아름다운 예비부부의 굳은 믿음과,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히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의 심정처럼, 진중하고 경건하며, 진솔하고 담담하게 흩어진 마음을 모아 새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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