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라도 알람 음으로 설정되는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끔찍한 노래가 될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확신하며, 늘 그렇듯 알람 소리에 '5분만 더'를 반복하다 시작하는 하루.
힘들다. 목욕탕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까칠하다. 주중을 지나 주말로 달려 갈수록 낯빛은 피로에 찌들어 거무튀튀 해지고 있다.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쳐 보지만 낯설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나의 얼굴도, 나의 마음도.
며칠 전 우연히 만년필 가게에 들른 적이 있다. 가게 안에는 자그마한 공간에 여러 종류의 만년필과 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요즘도 만년필을 쓰는 사람들이 있나 보네?" 호기심에 가격을 물어보았다. 가격이 꽤 비쌌다. 이유를 물어보니 개인 취향에 맞추어 수 작업으로 제작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개인 취향이란 사람들 저마다 갖고 있는 글씨 쓰는 습관을 말한다. 펜을 꼭 쥐고 쓰는지 살살 쥐고 쓰는지, 글씨를 굵게 쓰는지 가늘게 쓰는지, 부드럽게 쓰느지 거칠게 쓰는지, 힘을 주어 꾹꾹 눌러쓰는지, 살짝 들고 쓰는지, 그리고 펜 나가는 소리가 '삭삭삭'이 좋은지 '슥슥슥'이 좋은지 등을 말한다.
이런 취향에 맞추어 펜대의 굵기, 재질, 길이, 펜촉의 재질, 넓이, 크기, 펜촉에서 잉크가 많이 나오게 하는지, 적게 나오게 하는지 등이 결정된다고 한다. 펜 하나를 만드는데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며 만든다는 것이 놀라웠다. 주인아저씨께 자주 사용하지 않을 것 같고 고가의 가격이 부담이 된다고 하니 말씀을 하신다.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스스로 자신을 위한 선물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위해 선물은 하지만 자신을 위한 선물은 하지 않죠. 내 것을 산다고 해도 필요에 의해 구입하는 것과 나를 위해 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입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자주 사용하지 않아도 나에게 받은 선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이든 나 자신에게 받은 선물은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자신의 무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 기회에 손님 자신에게 선물을 해 보세요"
나는 잠시 멍하니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와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아저씨의 말이 장사를 위한 수완이라고 해도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이제껏 나 스스로가 나를 위해 선물했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물끄러미 내 앞에 서있는 나에게 미안함이 몰려왔다. 내 안의 나를 잊은 채 보살피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생각하니 왠지 슬픔이 몰려왔다.
" 그래. 넌 항상 그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구나...."
2015년 여름. 서울역
돌이켜 보면 그동안의 삶은 팽이 같은 삶이었다. 돌아가는 속도가 늦어지면 쓰러질까 불안했고,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욕심은 더 해져 나 스스로가 팽이채를 더욱 세게 휘둘렀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팽이는 화려한 무늬만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보여 주려 끊임없이 돌았다. 그 속도는 너무 빨라 어지럽기도 하고 울렁거리기도 했지만, 멈추는 것이 두려워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정지해야만 볼 수 있는 나의 무늬는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삶은 오늘도 이어져 반복되는 아침 일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며, 팽이처럼 도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일터로 향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에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내가 비치고 있었다. 빨간색으로 켜져 있던 숫자의 불들이 하나씩 꺼지며 층마다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이제 내가 내려야 할 층이 가까워 오고, 본격적으로 팽이를 돌려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띵! "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긴다. 엘리베이터를 벗어나기 전 왠지 모를 착잡함에 거울 속 나를 바라본다. 초췌한 얼굴의 내가 있다. 그리고 날 바라보며 얘기한다.
" 당신은 당신 스스로 당신을 위한 선물을 해보 적이 있나요? 그리고 당신의 진정한 무늬는 무엇인가요? "
만년필 가게 사장님께 얘기를 듣는 순간 당황스러우면서도 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등 늘 누군가와 함께 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무언가를 함께 하는 삶이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힘이 들 때 나 스스로가 나를 치켜세워주고 나를 위로할 수 있었던 적은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년필 가게에서 들었던 말처럼 내가 나에게 전하는 나 만의 선물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는 힘들고 어려울 때면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마음이었을 뿐, 저 스스로를 생각하며 나를 위로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스무고개 필요 없이 한 번에 집어낼 수 있는 위로받아야 할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저 스스로가 외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 받는 누군가의 위로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마음 있어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가장 잘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마음을 추스르는 주체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나를 위해 모든 허물을 벗어던진 진심이 묻어나는 스스로가 전하는 나의 선물은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숨겨둔 나의 진솔한 마음을 찾아낸다면 기억도 가물가물한 나만의 무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고 소박할지라도 나로부터 선물을 받고 나면 더욱 힘이 날것이고 우울해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나 자신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고요.
멋지고 화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는 짧은 여행, 나만을 위한 커피, 한잔의 차, 단 십 분이라도 나 만을 생각하며 걷는 산책, 명상, 책 읽기, 그리고 지금의 저처럼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나를 표현하는 글.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것이기에 이기적이라 생각될 수 있겠지만, 그동안 살아오며 애써왔던 나와, 앞으로의 나를 생각해 보면 그리 몹쓸 이기심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나만을 위한 선물로 나를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고 바라봐 주세요. 그러고 나면 그 마음을 뿌듯해하고 고마워하는 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욱 나를 소중해하는 나를 말입니다.
2015년 가을. 제주 별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