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우리에게 고봉밥을 지어 주셨다.
과목명, 마이크로프로세스. 일명 '마프'
대학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다. 교수님이 내주시는 엄청난 과제도 부담이었지만, 무엇보다 Z80, 8086, 어드레스, 메모리 맵, 레지스터, 플래그, ALU 등등의 도무지 알 수 없는 용어들이 수업 때마다 칠판 한가득 자리를 차지했고, 이전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강의를 이해하기가 힘겨 웠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마도 그때 심정은 "나는 본래 이과를 가면 안 되었고, 문과를 갔어야 했어" 하며 고등학교에서 선택한 계열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 책상에 앉아 있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난 지금 대학 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인 마이크로프로세스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된 사연은 대학 졸업 후 처음 입사한 기업에서 나를 이쪽 분야의 파트로 배정을 하였고,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을 때는 눈앞이 깜깜 할 만큼 나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아마도 인사담당자가 나의 대학 성적표에서 유일하게 D를 맞았던 과목이 무엇이었는지를 꼼꼼히 보았을 텐데 왜 그처럼 발령이 났는지는 지금도 모르는 일이다.
시간은 흘러 이제는 마프라 불렸던 명칭도 '임베디드 시스템'이라는 용어로 바뀌었고, 아마도 예상컨대 지금 대한민국의 어느 강의실에서는 여전히 예전의 나와 같은 심정으로 학생 한둘 정도는 까막눈을 껌뻑이며 "난 임베디드 분야로는 절대로 취업하지 않을 거야"라고 되뇌며 전공 필수라는 강압적인 의무 아래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가끔 직장 동료들과 예전의 이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항상 듣는 질문은 그래서 지금은 그 일에 만족을 하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항상 이렇게 대답을 한다.
" 뭐 하다 보니 하게 되고, 이제는 이거 아니면 다른 일은 못할 거 같아. 그렇다고 해서 이일을 하면 행복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도 싫어하던 과목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불행한 걸까? 아니면 행복한 걸까?
사실 그 대답을 확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각해 본다면 불행보다는 행복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가 즐거워 행복을 느낀다기보다는, 지금의 일이 행복을 가져다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니 예전의 어느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몇 개월을 공들여 개발한 제품이 첫 양산이 되었고, 판매된 제품 중에 필드에서 문제가 생겨 품질 담당자와 우리 연구소 직원들이 문제가 발생한 고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전북의 신태인이라는 곳에 위치한 가정집이었고, 그곳을 찾아가니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의 자녀들은 모두 출가를 하여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과 손주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으실 때 전화를 하시려고 큰 맘을 먹으시고 구입한 전화기가 말썽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문제 되었던 부분을 해결한 후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 하자, 할머니는 대문 밖으로 나서는 우리를 잡으시며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전화 거는 일이 당신의 유일한 낙인데, 이 먼 곳까지 찾아와 고쳐줘서 고맙다고 하시며 때아닌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셨다. 조금은 당황스럽긴 했지만 벌써 방에는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보였고, 고봉처럼 솟아오른 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식사할 시간이 아닌 어중간한 시간이었음에도 어찌나 맛있게 밥을 먹었던지 지금도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날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할머니께 감사 말씀을 드렸고, 생각지도 못했던 할머니의 따뜻한 한 끼 식사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것은 늘 일정에 쫓겨 일을 하고, 그래서 이 일은 내일이 아닌 것처럼 힘들어하며 때로는 뛰쳐나가고 싶었던 마음 안에서 개발했던 제품이 누군가에는 고맙고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날은 내가 일을 하며 처음으로 보람을 느꼈고,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올 한 해를 지내며 여러 SNS와 브런치에서 읽었던 글 들을 돌이켜 보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행복'이라는 단어이다. 사람들은 취업, 일과 직장, 퇴사, 여행, 일상 등에서 끊임없이 행복한 삶을 찾으려 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많은 방법 중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글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 했으며, 용기를 내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삶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군가는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했고, 보고 싶지 않지만 보아야 하는 사람들을 마주 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다. 때로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벗어나려 애도 써 보았지만, 매 순간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 결단을 다음으로 미루곤 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너무 갈망한 나머지 스트레스와 깊은 상실감마저 들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 해가 저무는 지금. 예전 어느 할머니가 지어주신 따뜻한 밥상을 떠올리며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바라던 행복의 부피와 무게가 점점 커지고 무거워진 것은 아닌지. 그래서 어쩌면,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슬며시 다가오는 작은 행복의 기회를 잃을 수도, 때로는 그것이 왔다 해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하루 종일 환자들을 마주 하는 의사와 간호사. 추운 날씨 속에 붕어빵을 팔고 있는 중년의 부부. 9년이란 시간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수한 캐릭터로 묵묵히 자리를 지킨 어느 연예인. 가정일과 육아를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쓰는 주부.
그들에 의해 아픈 사람들이 웃을 수 있고, 한 봉지의 붕어빵으로 잠시라도 집안 식구들이 모여 이야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상황과 같은 주부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그래서 힘들었던 마음을 위로받고, 바보라고 생각될 만큼 순수한 어느 연예인을 보며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는 고맙고 감사하다는 진정 어린 마음과 말들.
그처럼 내가 몸담고 있는 일의 결과로 인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래서 상대가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면 그것 또한 소중한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은 주는 상대는 생각하지 않은 채, 받기만 할 나만의 행복만을 생각했던 것 같다. 현재의 나의 일이 힘들고 어렵다 해도 나로 인해 누군가 기뻐하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의 결과에 의해 등골이 아플 정도로 힘든 사람들의 삶에 위로를 주고 웃음을 짓게 해주어, 진정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해 받는다면 그것 또한 행복이 아닐까?
예전 신태인에 살고 계셨던 어느 할머니가 담아주신 수북이 솓아오른 고봉밥의 높이만큼이나, 정성과 고마움이 담긴 한 끼의 식사를 바라보며 느꼈던 내 마음의 행복처럼.
< 이미지 출처 >
1. www. pixabay.com
2. www.dogdrip.com/bbs/board.php?bo_table=drip&wr_id=28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