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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Mar 15. 2017

내가 제주올레길을 걷는 이유

힘이 들 때면 나는 또다시 그 길 위에 설 것이다.


입사를 한 후 10여 년이 지난 때였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일을 했다. 내가 개발한 제품들이 커다란 전시장에 진열되어 사람들에게 팔려 가는 것이 뿌듯했고, 진급도 물 흐르듯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오기 마련이듯,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의 뒤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니 그저 그런 삶인 것 같았다. 뒤돌아 보며 나의 현재를 고민해 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도 되고 안타깝기도 했다. 회사생활 10여 년에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그렇다고 하듯,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화순 금모래 해변, 제주올레 10코스


모든 것은 밋밋했다. 무언가 전환이 필요했고 극복할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할 것인지. 참 어렵고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최소한 가는 줄기라도 만들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제주 올레길을 알게 되었다. 당장에 배낭을 꾸렸다.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길을 걸으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처럼 극적인 사연은 아니더라도 처음 입사했던 청년의 마음이고 싶었다. 정답이 없을 수도 있고, 있다고 해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올레길 이정표처럼 남아있는 나의 길에 방향을 잡고 그곳으로 걸어갈 수 있는 마음을 얻고 싶었다.


건입동, 제주올레 18코스


제주 올레길은 1코스인 시흥초등학교를 시작하여 마지막 21코스의 종점인 종달리까지 제주의 속살을 느끼며 걷는 길이다. 정식 코스 외에 알파코스라 불리는 5개의 코스가 더 있고, 가장 근래에 만들어진 3-B코스를 포함하여 전체 27개 코스, 약 425 키로 미터의 길이다. 만약 길을 걷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누군가는 그 먼길을 언제 다 걸을지 걱정부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425 키로라는 숫자만큼 먼 길이지만 막상 그 길 위에 서면 그 이상을 넘어 자꾸만 걷고 싶어 지는 길이다. 길 위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숨어있는 제주의 삶이 있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작가 '김진석'님의 작품들, 제주올레 18코스
말미오름에서, 제주올레 1코스


처음엔 혼자 걷는 올레길이 낯설었다. 이전의 여행은 가족 혹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었고, 혼자만의 여행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스를 타면 기사 아저씨께 내려야 할 곳을 물었고, 목적지에 내릴 때도 다시 되묻곤 했다. 홀로 차를 타는 것, 홀로 숙소에 들어가는 것, 홀로 밥을 먹는 것. 모든 것이 낯설었고 어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행을 마치고 나면 다른 여행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자신감 같은 것이었는데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마치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나 홀로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을 때럼 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함이 섞인 감정은 아직 나에게도 가능성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엄마와 아가, 제주올레 21코스
아빠와 아이, 제주올레 21코스


누군가는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 큰 어른이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 철이 덜든 어른 같아 부끄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 마음 뒤에는 스스로는 기뻐하고 대견해하는 나의 본심이 있었다. 행동을 홀로 했다는 사실 보단, 홀로 이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던 나의 마음이 대견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용기 같은 것이었는데, 아이 같은 어른이 나이, 사회적 위치, 낮은 자존감, 관행, 습관, 체면 때문에 주저하거나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할 수 있었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을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동만 하면 되었던 것을 내 마음은 갖가지 핑계를 대었던 것이다.


신촌포구, 제주올레 18코스
종달리, 제주올레 21코스


사람들은 여행을 가기 전 말하곤 한다. 일상을 떠나 마음 정리를 하겠다고. 나도 길을 걷기 전에는 길을 걸으면 마음에 두었던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멋진 철학자라도 된 듯 하나의 화두를 갖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길 위에선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가에 핀 꽃을 보았고, 평생을 업으로 삼으며 농사일을 하는 어르신들을 보았으며, 깊은 바다로 나아가며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보았다. 그 모든 것들은 깊고 진한 삶이 베인 의도 하지도, 연출되지도 않은 만남들이었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뜻깊은 것들이 되어 주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마음 한 구석에 있던 아픔들을 꺼내어 보듬어 주었고, 내가 추구하는 삶을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온기를 넣어 주었다. 방법보단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 잡아 주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은가? 다만 실행을 하지 않거나 망설일 뿐이지.


대수포구, 제주올레 15코스
낙천리 가는길, 제주올레 13코스
종달리가는 길, 제주올레 21코스


오랜 시간 동안 길 위에 있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길은 운명적으로 우리와 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길은 우리에게 원시의 속도만큼 느림을 주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걸으면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볼 수 있고, 잠시 혹은 한동안 머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것들과 함께 길 위의 나가 아닌, 길과 함께 하는 나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처음 올레길을 걷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흥초등학교에서 내려 길을 시작했던 순간이다. 삼월이었던 그때는 바람 한점 없었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었다. 봄이 한껏 피어 올라 길가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지만 모두 제 자신을 돗보이려 자랑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내가 본래 서야 할 곳을 찾은 것처럼 나의 폐 속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숨을 내뱉자 인생에서 몇 번은 꼭 찾아온다는 기회보다 더 값진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난 그렇게 길을 걸었고 길은 공평했고 차별도 없었다. 단지 내가 걸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내주고만 있었다. 돌이켜 보면 올레길은 어쩌면 나와 뗄 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마음의 한 부분에서 커다랗게 자리 잡으며 여전히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봄꽃, 제주올레 1코스
봄의 정경, 제주올레 1코스
들꽃, 제주올레 7코스
우도의 봄, 제주올레 1-1코스


올레길을 걷고 오면 파란색과 주황색 리본이 눈에 아른거리고 화살표만 보면 왠지 그곳을 바라보며 따라가야 할 것처럼 된다. 모두가 올레길을 걷고 나서의 부작용 같은 것인데 사실 그것은 작은 에피소드이며 길을 걷고 나면 마음은 항상 제주의 길에 흠뻑 취하고 걸러져 맑게 정화가 된다. 예를 들어 새치기를 하는 차를 보면 불쾌하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에도 급한 일이 있거나, 혹은 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되려 급하고 촉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처럼 길은 이해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었으며, 하루 혹은 이틀을 보내며 멀다면 먼 길을 걸었다는 자만심 보단, 길 위에 있던 초라했지만 오롯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겸손을 알게 했고, 더불어 나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하게 했다. 물론 개과천선 하여 세상에 더없이 천사 같은 사람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을 걷기 전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더욱 많이 생기고 마음에 채워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마치 영험한 약을 먹은 듯 한 동안을 이어갔고 난 또 치열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물들어 조금씩 그런 마음도 사라지곤 했다. 그러면 난 다시 길을 걸었다. 그 선했던 마음을 잊지 못하고 그 마음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알오름에서, 제주올레 1코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 제주올레 21코스
월평포구 가기전, 제주올레 7코스


사람은 늙는다. 시간과 함께 몸도 마음도 계속 변한다. 그리고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완성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신에게만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완전에 가깝게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며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지나온 날들을 후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고민하며 방황하기도 한다. 그리고 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물음표를 던지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처럼 매일을 불안전하게 살아 가지만 그렇다 해도 나에게는 최선의 답을 찾을 수 있는 힘인 이해, 공감, 겸손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있다. 그것은 제주의 올레 길이며, 길을 걸으며 힘든 마음을 다독이고 불안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당당히 맞이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것이다. 올레길은 모든 것을 안아주고 이해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길의 끝을 놓지 않는 것이다.


한림항, 제주올레 14코스


사람들은 오늘도 올레 길을 걷는다. 길은 텅 빈 마음을 채워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걸으면 걸을수록 내가 왜 그 길을 걷는지의 목적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목적이 더욱 분명해질수록 나의 삶의 목표와 행동도 명확해질 것이며, 올레길은 그 길로 안내할 것이다. 그것은 족집게 과외처럼 한 번에 척척 알려주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깨닫도록 하며 느낄 수 있도록 길은 자신을 허락해 줄 것이다. 왜 살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제주 올레길을 걷는 이유인 것이다.


 별방진위의 사람들, 제주올레 21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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