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카를 끌던 노인이 생각났다
평소와 달리 도로에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차들은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고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차들은 어느 지점에 가까워 오자 차선을 옮겨가고 있었다. 사고가 났구나 싶어 나도 차선을 옮겨 갔다. 잠시 후 무언가가 잔뜩 실린 리어카가 보였다. 등이 굽은 노인은 종이 박스를 가득 실은 채 도로 한 복판에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메마르고 주름이 가득한 손. 절박하리만큼 세게 손잡이를 잡은 손만큼 노인은 힘겨워 보였다. 하루라는 생을 위해 절대로 놓을 수 없었던 손. 노인은 자신 때문에 차들이 밀리는 것이 미안한 듯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발걸음은 더욱 힘겨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빨리 비키라며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들이 미웠고 부끄러웠고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주말 오후. TV에선 어느 식당을 소개하고 있었다. 식당 안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입구에까지 줄을지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포터는 해산물이 가득한 음식을 소개하고 있었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살아있는 낙지들이 꿈틀대는 것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리며 가성비가 최고라 감탄하며. 그리고 이 모든 음식이 단돈 '얼마 밖에' 안 한다며.
채널을 돌리니 홈 쇼핑 방송에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서두르라 하며 주문을 재촉하고 있었다. 쇼호스트는 바라보는 사람보다 더욱 상기되어 실제로 체험을 해가며 이렇게 좋은 품질의 제품이 단돈 '얼마 밖에' 안 한다며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기획을 하여 공들였기에 다른 곳에선 이런 가격으로 살 수 없다 하며. 그래서 '얼마 밖에' 안 하는 가격을 놓치면 정말 후회할 것이라 하며.
며칠 전 도로에서 보았던 리어카 끌던 노인이 생각났다. 굽은 허리와 깡 마른 손이 생각났고 리포터와 쇼 호스트가 힘주어 말하던 '얼마 밖에'라는 말이 생각났다.
'밖에'라는 말. 누군가에게는 당장이라도 충분히 감당하고 감내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그만큼을 얻으려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 어쩌면 눈물이 날 만큼 죽을힘을 다해도 도달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누구에게는 시작이지만 누군에게는 마지막이 될 그 단어.
잘살고 못살고는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큼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금수저 흙수저라는 태어났을 때의 운명 때문 일수도 있다. 그렇기에 '밖에'라는 말은 사람들마다 느끼는 범위가 모두가 다를 것이다. 내가 벌어 내가 가진 만큼 쓰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최소한의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최대가 될 수 있어 가슴 아픈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말을 쓰기 전엔 배려가 필요하다. 그 말의 경계가 버거운 사람들에게는 아이에겐 이 만큼밖에 해주지 못하는 부모이기에 마음이 아플 것이고, 부모님에겐 이 만큼밖에 돌보아 드리지 못하는 자식이기에 죄를 짓는 마음일 것이며, 아내에겐 이만큼 밖에 안 되는 자신을 선택해준 마음이 미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밖에'라는 말. 그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과시가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부러움과 절망이 될 수 있는 말. 기쁠 수는 없어도 슬퍼질 수는 있는 그 말을 되뇌며 노인을 생각하고 TV를 보며 생각했다. '밖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의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모든 사람이 공평할 순 없어도 배려가 있어 따뜻한. 그래서 과시도 부러움도 절망도 없는 누구에게나 평범한 일상뿐인 그 세상 안에서, 리어카를 끌며 힘겨워했던 노인도 함께 였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