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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Oct 31. 2018

가을엔 핑계를 대어야 한다

내가 가을에 여행하는 이유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는 늦가을 냄새가 가득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기도 했고 하늘 위로 젖혀지기도 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 않았다. 흩날리고 떨어지는 것이 가을이기 때문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감정이 몰려왔다. 좋지만 떠나야 하기에 슬프고, 떠나면 보고 싶어 곁을 떠 날수 없는 정의할 수 없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길을 가야 했지만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갈대 때문이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같은 황량한 들판에 있는 갈대는 쓸쓸해 보였다. 갈대들이 사라질 끝은 차가운 겨울이겠지. 따뜻함도 생기도 얻을  없는. 그러나 갈대들은 묵묵히 생을 보내고 있었다. 바람 불면 모두가 하나인 것처럼 똑같이 몸을 뉘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갈대들은 각자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처럼 저마다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온기가 가득한 붕어빵 든 봉투를 품에 안고 따스함이 사라질까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가장처럼, 검은 밤 빛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에서 골몰히 일하는 누군가처럼. 들 속에는 우리 가족이 있고 동료가 있고 친구가 있었다. 갈대들은 끝이 땅에 닿을 만큼 휘청거렸다. 그렇지만 결코 꺾이지 않았다. 시련을 이겨내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처럼, 갈대는 강인하고 아름답게 가을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벌판에서 어우러지는 갈대들은 나에게 힘이 되어주어 소중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우연한 생각에 빠졌다는 노래를 오래오래 들었다. 노래가 몇 번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과 바다와 갈대를 보기 위해 다음 가을에도 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내렸다. 늦은 여름을 보내는 비가 멈춘 세상은 깨끗했다. 새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티끌 없이 맑은 하늘에 새로운 계절 색이 한없이 넓게 펼쳐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나면 가까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가워 할 수만은 없었다. 보고 싶었지만 천천히 오기를 바랐다. 헤어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떠나보낼 것을 각오하고 맞이해야 한다. 늘 그리워하던 계절 가을을.


수많은 이유와 수많은 의무는 나의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순간 뛰쳐나가고 싶지만 삶의 따가운 시선에 나는  손을   꼼짝도  한다.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떠나면 좋겠지만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먼저여서 그럴 수만은 없는 것이 삶이다. 그러나 나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던 몸을 움직여 보려 한다. 언젠가 보았던 가을 때문이다. 그곳에는 쉬어갈 벤치가 있고 바람이 있고 갈대가 있다. 넘어지고 쓸리지만 다시 일어나는 갈대들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있다. 쓸쓸하지만 쓸쓸함이 가을이라고 인정하면 한없이 아름다운 . 그곳이 잊히지 않는다.


가을엔 핑계를 대어야 한다. 현실이 내 앞을 막고 당장 해야 할 일을 들먹이며 삶을 재촉해도 어수룩한 이유를 대어서라도 떠나겠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속이 꽉 찬 어른인지는 알 수 없다. 삶이 내게 철부지 같다며 무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가을엔 철없는 아이가 되어 떠나야 한다. 품에 안기기도 전에 떠나야 할 것을 슬퍼할 만큼, 가을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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