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봉에서 바라본 세상
이 오름 안 오르시면, 정말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다른 코스에 비해 짧기는 하지만 아침에 출발한 길은 제주의 청명한 가을을 느끼며 하루 종일 들판을 쏘다니며 뛰어논 아이들처럼 즐기다 보니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지치는 듯하다.
사람들이 21코스 종점인 종달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어느 오름 입구에서 멈추어 선다. 이유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길은 오름을 오르는 길. 다른 한길은 오름을 오르지 않고 돌아서 가는 길. 힘든 표정의 몇몇 사람들이 오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아저씨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표정으로 아이같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씀을 하신다.
" 이 오름. 오르시지 않으면, 정말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아~ 그냥 좋다고만 할게요. 제가 얼마나 좋은지 표현은 못하겠어요. 두 눈으로 직접 보시지 않은 이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풍경이거든요. 천천히 올라보세요. 오르시다 힘드시면 쉬셨다 오르시면 되죠"
아저씨의 모습은 확신에 차 있었고, 이 모습에 몇몇 사람들은 올라보겠다 하고, 몇몇 사람들은 그냥 우회도로로 제 갈길을 간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거칠다
다른 오름에 비해 경사가 있어서 그런지 오르는 시간은 짧지만 단박에 힘은 꽤 드는 오름이다.
나도 오르다 보니 가을 햇빛에 그을릴까 썬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얼굴에 둘렀던 머프도, 머리에 썼던 모자도 모두 벗어 버렸고, 등에서는 언제 그칠지도 모르게 하염없이 내리는 비처럼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오르던 길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다. 오를수록 하늘은 점점 가까워 오는데 아직 정상은 아닌 것 같고,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려고 비싼 비행기표 끊고 여기까지 걸어와서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아마 입 밖으로 크게 소리 내어 얘기했다면 주변의 몇 명은 맞다며 맞장구를 쳤을지도 모를 만큼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는 이런 생각이 덧 없이 부질없다는 것을 매번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이렇게 얼마를 더 올라야 하나 생각하며 오르는데, 잠시 후.
" 와~~!......." 하는 탄성이 들려온다.
그 소리에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힘을 내어 좀 더 오르니 좀 전까지 힘들어했던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모두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다가가 보니 아직 정상도 아닌데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성산 일출봉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다. 여기가 이 정도니 정상에서는 더 큰 무엇이 있을 거란 기대가 차 오른다. 그렇게 달콤한 애피타이저 같은 풍경은,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채우듯, 나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두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고, 사람들은 그 힘을 실어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재촉한다. 이젠 점점 정상이 가까워 오는 듯하다. 사람들의 감탄 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드론이 부럽지 않다.
드디어 오름 정상이다.
막힘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으로 올라오던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 준다. 하염없이 빗물처럼 줄줄 흐르던 땀도, 턱밑까지 숨이 차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했던 간사했던 생각도 덧없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눈앞에는 거침없는 제주의 그림이 병풍처럼 펼쳐져 제주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
광활한 대지위에 멀리까지 보이는 오름들의 봉우리들. 소가 드러누워 있는 형상의 우도. 종달 포구. 그리고 우뚝 솟아 있는 성산 일출봉. 아까 그 아저씨 말대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풍경이다. 그저 눈으로 보고 그 느낌을 가슴에 담으며 울컥하며 눈물이 날 만큼 벅차오르는 마음을 다스릴 뿐이다.
"위 이 이잉"
축제 현장을 찍기 위해 방송사에서 띄운 드론이 아까부터 올레꾼들을 따라다닌다. 걷는 내내 나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부러웠 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나도 저 멀리 세상을 바라볼 수가 있으니까.
지금 만큼은 저 드론이 결코 부럽지가 않다.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아마 오르지 않았다면 후회하지도 못했을 거다.
사람들은 본능이라 할 정도로 너도나도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셔터를 누르며 눈에 보이는 풍경을 찍으면서도 바라보이는 풍경에 욕심이 생겨 한 장의 사진으로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잠시 후 올라오는 올레꾼 중 아까 전 오를까 말까 망설이던 사람들이 보인다. 얼굴에 땀은 흐르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리고 서로들 얘기를 한다.
" 정말 오르기를 잘 했네요. 정말 후회할 뻔했어요. 이런 멋진 풍경이 있었다니...."
아마 오르지 않았다면 후회하지도 못했을 거다.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는지 알 수도 없었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표정에서 이곳에 오르고자 했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옳은 선택...
사실 그것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나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며, 그것에 따라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정해진다. 비록 선택의 결과가 나쁘다 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내가 추구하는 삶에 한 발자국 더 앞서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선택이었음에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내가 추구하는 삶 속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 것이며, 그 인생에서 수없이 마주하는 선택이 최선이 되어야 함을 평생의 숙제라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다.
다리는 무거워 보이고 온몸에 땀은 흐르지만 찡그린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입가에 미소만이 가득하다.
2015년 어느 가을.
나는.
제주 동쪽 올레 21코스 지미봉 정상에서,
푸르른 가을 햇살 아래,
세상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행복하다!
- 2015년 가을 제주올레 축제 21코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