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L사 휴대폰을 쓰게 된 동기는 감성적인 이유에서였다. 좋은 기능이 있는데도 나 잘났다며 어필을 못 하는 L사 휴대폰이 좀 않되 보여서였다. 밀스펙(Military Spec)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환경에서도 고장 없이 견뎌야 하는 강건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군 장비에 적용되는 스펙이다. 그중 환경조건과 관련된 스펙(ML-STD-810G)이 있다. 지금이야 여러 휴대폰에 적용되고 있지만 3년 전만 해도 구현이 까다로워 전문 아웃도어용 폰 외에는 적용된 폰이 거의 없었다. 그런 스펙을 당시 L사가 일반 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L사는 이 좋은 성능을 홍보하지 않았다. 강력한 마케팅 포인트임에도 겸손 때문인지 홍보 능력 부족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잘 만들고도 자랑을 못하는 폰이 좀 안쓰러웠다.
그런 인연으로 선택하여 지금까지 잘 써왔던 나의 L사 휴대폰이 문제가 생겼다. 뒤쪽 케이스가 떨어져 삼분의 일쯤 벌어진 것이다. 알고 보니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 케이스를 밀어낸 것이었다. 폰 속 부품들이 보일만큼 벌어짐은 점점 심해졌다. 빨리 A/S센터에 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수리를 하는 것보단 이참에 폰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한창 선전하는 초호화 스펙으로 무장된 S사의 최신폰으로.
훤히 속이 보이는 L사의 휴대폰으로 검색한 S사의 휴대폰은 화려한 스펙에 번쩍번쩍 좋아 보였다. 몇 번을 보다 보니 나는 S사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급기야는 온라인으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마지막 신청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문득 예전 L사 휴대폰 받던 날이 생각났다.
누구든 새 휴대폰을 받는 날은 설렌다. 나도 그랬다. 하루 종일 휴대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택배 배송 조회 버튼을 수도 없이 눌러댔다. 기본으로 제공하는 액세서리가 있음에도 굳이 또 다른 액세서리를 사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폰이 도착해 개통을 하고 어플 몇 개를 설치하고 사진 몇 장을 찍고 인터넷을 접속하고. 그런데 이상했다. 그게 다였다. 새 휴대폰을 손에 쥐면 무언가를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달랐다. 한마디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동안 무엇 때문에 마음이 설레었던 걸까?
두근대며 기대하던 마음이라면 이런저런 새로운 기능들을 접해봐야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필요한 어플 몇 개를 설치하고 사진 몇 장을 찍고 잠깐 인터넷을 보고. “스마트 폰”의 “폰”이라는 단어만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잘 들려?” 하면, 상대방은 "어 잘 들려!" 이러면 끝인 거였다. 한껏 부풀었던 마음과 달리 새 휴대폰을 받아 든 결과는 밍밍한 단물처럼 시시했다. 다음날 직장 동료들에게 “나 최신 휴대폰으로 바꿨어"라고 말해볼까 했지만 그것도 좀 민망한 일이었다.
신청서 작성은 끝났으니 완료 버튼만 누르면 S사 휴대폰이 내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스펙이 화려하고 블링블링한 S사의 휴대폰이지만 굳이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배불뚝이가 된 배터리만 교체하면 사용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폰에 담겨있는 것들. 사진, 음악, 생각들을 적은 메모장, 문자 메시지, 카톡 메시지. 그것들을 어딘가에 저장해 놓는다 해도 다시 보는 경우는 드물 것이 뻔했다. 지난날의 흔적들을 잃어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 L사 A/S 센터에 갔다. 배터리가 교체된 휴대폰은 멀끔했다. 앞으로 일 년 이상은 끄떡없을 것이다. 얼마 전 L사는 계속된 적자로 휴대폰 사업을 접는다고 했다. 이제 L사의 후속 휴대폰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사용하고 있는 폰이 나에게는 L사 폰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어느 기업 제품을 좋아하고 아니고를 떠나 좀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폰에는 서운해야 할 것들이 더욱 많이 쌓일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끝은 올 것이다. 그러나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나의 감정과 삶의 흔적들을 오래 쌓을 수 있도록 잘 버텨 주기를 바란다. 그러고 보니 시작이 감성적이었는데 끝도 감성적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