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 자리

TV 앞 남자들

하루의 피곤을 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by Ollein

낮 동안 걸치고 있던 허물들을 목욕탕 로비에서 받아 든 열쇠와 똑같은 번호의 옷장에 넣은 남자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고되었던 하루의 피곤을 씻으려 이곳에 왔지만 TV에 시선을 뺏겨 마루 같은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연속극을 보고 있다.


아주머니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연속극은 음식의 맛을 배가시키는 MSG 같은 역할을 하는 막장 전개와 없어서는 안 될 권선징악이 섞여 뻔 한 결말이 예상되지만 남자들은 해피엔딩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듯 온 정신을 그곳에 몰입하고 있다. 탕 안으로 들어가려던 몇몇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TV에 집중하는 무리들 속에 섞여 눈길을 함께 보탠다. 이제 극은 오늘의 최고 절정 장면으로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 절박하고 극적인 순간의 긴장감을 깨고 어디선가 ‘쌕~쌕~’ 하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루 동안의 피곤을 두 눈꺼풀에 가득 얹고 TV를 보던 중년 아저씨의 졸음은 이내 깊은 잠이 되어 버렸고, 고개는 점점 아래로 쏠리며 코 고는 소리는 점점 커져 가지만 그것이 듣기 싫다고 하여 흔들어 깨우는 이는 없다.


또 다른 한쪽에선 휴대전화 벨이 울리고 그 전화의 주인이 전화 통화를 시작한다.

“어~아들아. 저녁 먹었니?”

“어~ 알겠어. 난 또 먹지 않았으면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지....”

“알겠어. 일찍 들어와라.”

남자는 아쉬운 듯 전화를 끊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배고픈데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네...”

그러곤 '한 줄 2000원'이라고 적힌 삶은 달걀 한 줄과, 각종 음료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냉장고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를 집어 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TV에 집중하고 있다. 이제 극은 오늘 최고 절정의 장면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딩.동.댕~~~” 하는 알림 소리와 함께 목욕탕에 방송 소리가 퍼진다.


“알려 드립니다. 남탕에 누구누구 아버님. 밖에서 누구누구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입구 로비에서 번호표를 준 아주머니의 목소리이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남탕에 누구누구 아버님. 밖에서.... 누구누구 어머님.... 기다리고... 빨리..... 바랍니다 “


그 방송 소리가 끝나게도 무섭게 코를 골며 깊은 잠을 자던 남자가 깜짝 놀라며 '축 개업'이라는 굵은 궁서체로 새겨져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바라본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돼버렸네....”


남자는 군인들의 5분 대기조 비상이 걸린 것처럼 후다닥 탕으로 뛰어 들어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밖으로 나와 옷을 부리나케 입고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의 빠른 행동은 아내와의 약속시간이 늦었음을 알려 주었고 아마도 누구누구 어머님의 핀잔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처럼 그가 사라지자 비록 귀는 불편했어도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아니 모른 척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니 편히 주무시소!" 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던 누구누구 아버님의 코 고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TV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리고 연속극은 해피엔딩을 보여줄 듯했지만 아쉬움을 남기며 결말을 다음 회에는 꼭 보여 주겠노라 예고하며 끝이 났고, 극이 끝나자 피곤한 남자들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라도 있었던 듯 하루에 두 알만 먹으면 그날의 피로가 풀린다는 피로회복제 광고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고, 남자들은 내일의 일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뿔뿔이 탕 속으로 흩어져 갈 뿐이다.


덤프트럭 운전수 아저씨, 횟집 아저씨, 꽃집 아저씨, 세탁소 사장님, 머리가 훤하신 공장 사장님, 시청 공무원, 한때는 위협적이었지만 이제는 세월의 흘러 흐릿하게 된 '인내'라는 문신이 있는 아저씨, 끊임없이 직장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는 회사원. 그처럼 누구의 아내,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아들로서 각기 다른 공간에서 그들을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을 위해 일한 후 찌든 얼굴로 TV를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의 모습이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자신과 같은 또 다른 '나'를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꼈던 사람들.


처음 만난 아이들처럼 금방 친해져 장난치며 함께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TV에 시선을 공유하는 시간만큼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을 반가운 동지애로 느끼며 잠시나마 무거웠던 짐들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목욕탕 안 뜨거운 물 위로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온다.


바라건대 그곳에서 만큼은 따뜻한 물속에서 모든 고단함이 씻겨져, 행복을 만들기 위해 내딛는 내일의 발걸음들이 좀 더 가뿐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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